18.12.08(토)
아침에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 덕분에 살짝살짝 잠에서 깼던 것 같은데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방에 나 혼자였다. 시계를 보니 10시.
'응? 10시? 이게 무슨 일이지?'
"여보. 왜 안 깨웠어?"
"어. 그냥 푹 자라고"
은율이랑 시윤이는 신나게 놀고 있었고 소윤이는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한 시간째 식사 중이라고 했다. 소윤이의 식사가 끝나고 어른들의 식사가 시작됐다. 승아는 아침에 잠깐 교회에 갔다 온다고 했는데 차 없이 가기에는 꽤 거리도 있고 번거로운 동선이었다.
"여보. 내가 승아 데려다줄까?"
"그래도 되겠네"
겉모양은 승아를 데려다주겠다는 수고와 헌신이었지만 마치 본인의 안위를 위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던 건 나의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정작 당사자인 승아는 매우 귀찮아하고 가기 싫어하는데 아내는 말과 행동에 가벼움이 묻어났다. 아내와 승아가 나가고 나서 나와 대성씨, 그리고 네 명의 아이만 집에 남았다. 대성씨랑 나는 친하지만 친하지 않다.
"PD님 커피 드릴까요?"
"아. 좋죠"
날 아직도 PD라고 부르는 사람이 지구 상에 둘 있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승아는 얼마 전부터 날 오빠라 부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제 대성씨 한 명이다. 대성씨는 네스프레소 캡슐로 내린 커피를 영국에서 산 고급진 빈티지 잔에 담아 줬다. 대성씨도 커피를 내렸고 사브레 맛이 나는 수입 과자 세 개를 비슷한 느낌의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놓았다. 각자 커피를 한 잔씩 두고 가운데는 사브레 맛이 나는 과자.
소윤이랑 은율이는 거실에서 자기들끼리 놀았고 시윤이는 어떻게든 끼고 싶어서 졸졸 쫓아다녔고 가을이는 바운서와 침대, 아빠 품, 범보 의자를 순회공연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커피잔 때문인지 은은한 고동색 계열의 식탁 때문인지 정갈하게 담긴 사브레 맛 과자 때문인지 아니면 적당히 이격 된 아이들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법 행복한 티타임이었다. 애 넷과 함께 하면서 누릴 수 없는 호사스러운 분위기랄까. 사람 따라가는 것 같다. 나 같았으면 수많은 종류의 액체가 담겼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어떤 기관의 이름과 연락처가 대문짝만 하게 찍힌 머그컵에 대충 따라줬을 텐데.
품격 있는 티타임 후에는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서 매우 추웠지만 아이들은 진작부터 놀이터 탐험은 언제 가냐고 보채고 있었다. 가을이는 유모차에서 잠들었고 시윤이는 유모차 탑승을 거부했다. 소윤이, 시윤이, 은율이는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잘 놀았다. 시윤이는 옷이 두꺼워져서 원래 자기 능력치를 다 발휘하지는 못했어도 형, 누나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놀았다. 꽤 추운 날씨였는데도 한 시간 넘게 놀았던 것 같다. 소윤이나 은율이나 한참 신난 상태라 뭔가 당근이 필요했다.
"우리 들어가서 핫초코 먹을까?"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데운 우유에 제티를 녹여서 한 잔씩 따라줬다. 웬일인지 소윤이는 크게 열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율이는 단숨에 먹어 치웠다. 가을이는 밖에서는 계속 자다가 집에 들어와서 유모차에서 꺼냈더니 엄청 울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울었다. 어디가 아픈가 걱정이 될 정도로 크고 길게 울어댔다. 분유도 안 먹고 쪽쪽이도 안 빨고 안아줘도 울고 앉혀놔도 울고 눕혀놔도 울고. 보통 이런 경우 남편들이 아내한테 전화해서 애가 너무 심하게 우니까 와야 할 것 같다고 전화를 한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고 대성 씨도 그렇고 운다고 전화를 할 생각을 하지를 않는 것 같다. 안타깝다. 첫 아이 때부터 득달같이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이미 너무 늦었지. 역시 울다 죽은 아이 없다고 가을이의 울음도 잠잠해졌다. 난 시윤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시윤아. 이제 코 자자?"
"으응"
"네 해야지"
"나아"
시윤이는 10분 정도만에 잠들었다.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소윤이랑 은율이는 식당 상황극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윤이가 열중하고 있었고 은율이는 응해주고 있었다. 소윤이는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상황극을 펼쳐 가려고 은율이에게 끊임없이 지시하고, 명령하고 착한 은율이는 웬만하면 소윤이의 요구에 응해주고 있었다. 유심히 관찰해 봤더니 은율이도 하다 하다 지칠 때는 소윤이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했다.
"은율아. 이거는 여기다 놔야지"
"......(자기 할 거 함)"
"은율아. 은율아. 은율아?"
".......(자기 할 거 함)"
"그래.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대성씨는 어느새 아이들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잠해졌던 가을이가 또 울길래 내가 가을이를 안았다. 소파에 앉아서 배 위에 앉혀 놨더니 꽤 오랫동안 가만히 손을 빨며 놀았다. 다른 때는 모르겠고 애들 키울 때 그나마 가장 유용하게 쓰인다. 내 배.
가을이를 앉혀 놓고 소윤이와 은율이의 재미없는 식당 상황극을 보고 있노라니 잠이 쏟아졌다. 살짝 졸다가 가을이의 울음소리에 깼다. 이쯤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교회에 가서 이것저것 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도망자가 제 발 저리겠지 뭐. 커피를 사서 금방 오겠다며 주문을 받았다.
대성씨는 소윤이와 은율이의 파스타를 완성했고 아이들을 식탁에 앉혔다. 속 시원하게 퍽퍽 잘 떠먹는 은율이도 있는 데다가 파스타 자체도 맛있어서 소윤이도 평소보다는 열심히 먹었다. 애들이 다 먹고 나니 우리의 파스타가 차려졌다. 우와. 대박. 진짜 너무나 맛있었다. (대성씨는 원래 요리로 돈을 벌었던, 어찌 보면 프로의 세계에 있었던 사람이다)
금방 오겠다던 아내는 파스타를 다 먹어갈 때쯤에나 돌아왔다. 굉장히 밝아 보였다. 잠시 후 하준이네도 놀러 왔다. 애가 일곱이 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집에 있는 거라 괜찮았다. 소윤이는 꽉 찬 오후가 되자 졸음이 밀려오는지 슬슬 짜증을 부리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두어 번 따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따끔 하게 혼내기도 했다. 폭군처럼 행동하는 소윤이와 시윤이 덕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은율이도 시윤이를 향해 공격성을 보였다. 레고로 옆구리를 찌르고 검지 손가락으로 빵야 빵야 총을 쏘고 목 뒷덜미를 잡으며 나쁘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귀여운 행동이지만 부모가 보기에는 하지 못하도록 훈육해야 하는 행동이라 은율이도 아빠랑 방에 들어가서 혼나고 나왔다. 하준이랑 얘기하다가 여인네들이 밤에 외출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 10시까지 재웠구나?"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얘기 중이야"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준이네가 가고 어느새 또 저녁 먹을 시간이 돼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하루 세 끼를 남의 집에서 얻어먹으려니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솔직히 다 맛있었다. 저녁 먹고 나서는 아이들 거품 목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욕조에 소윤이랑 은율이를 넣어주고 시윤이도 같이 앉혔는데 시윤이는 자꾸 미끄러지고 그래서 그냥 따로 아기욕조에 앉혔다. 소윤이랑 은율이는 당연한데 시윤이도 자기 몸에 딱 맞는 좁은 욕조 안에서 조그마한 물총 장난감 하나로 잘 놀았다. 꽤 오래 놀고 나서 한 명씩 씻겨서 내보냈다. 내가 자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10시까지 잔 대가가 참 크다고 생각했다. 술 취해서 술 값 눈탱이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울산 원정 육아인가.
거품 목욕을 끝으로 공식적인 육아 활동이 종료되었다. 아내랑 나는 소윤이랑 시윤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고 대성씨랑 승아도 은율이를 재우러 들어갔다. 소윤이는 곧바로 잠들었지만 오늘도 시윤이가 시간을 끌었다. 오늘은 아내가 유독 견디지 못하길래 먼저 내보냈다. 아내를 내보내고는 일부러 이 놈, 이 놈 하면서 울렸다. 우는 것도 볼 겸 들뜬 기분도 잠재울 겸.
꽤 오랫동안 시간을 쓰고 나서야 시윤이를 재울 수 있었다. 드디어 모든 아이들이 자고 어른들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 가을이 빼고. 시간이 꼬이고 늦은 바람에 아내와 승아, 한나의 회동이 무산되는 듯하다가 한나가 승아네 집에 오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불쌍한 하준이, 아니 울산의 션 하준이는 홀로 집에 남아 세 아이를 지키고.
한나도 데리러 가고 야식 거리도 사 온다면서 아내와 승아는 나갔다. 대성씨는 또 파스타를 만들었다. 하루 종일 뭔가 쉬지 않는 게 꼭 하준이 같았다. 울산에 션이 두 명이나 있네.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대성씨도 나름대로 시간 계산을 하고 파스타를 만들다가 중단했다.
"그런데 참 안 오네요"
"그러게요. 오늘은 나가기만 하면 함흥차사네"
아내랑 승아, 한나가 돌아왔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는데 아내는 왜 늦게 되었는지 주절주절 설명을 했다.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주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재밌었다.
벌써 토요일이라니. 지난여름에 왔을 때 많이 못 만나고 가서 아쉬운 마음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충분히 시간을 보낸 만큼 떠날 때가 되니 또 아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