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생일 맞지?

21.08.05(목)

by 어깨아빠

생일이다. 나의 생일. 아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애가 셋이 되다 보니 항상 뭔가 챙겨주고 보살펴야 하는데 익숙한 삶이 됐다. 그나마 그런 데서 좀 자유로워지는 날이 생일이다. 그렇다고 뭐 엄청 역동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여느 날과 똑같은 일상일 뿐이다. 아이가 많아지면 많이 질수록 더 그렇다. 결혼하고 첫 생일 때는 40도를 찍는 무더위 속 울산의 어느 오래된 뜨거운 주택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첫 생일이라며 탕수육을 직접 튀겨줬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난 다른 날과 다름없이 출근했고, 아내는 어제처럼 바빴다. 그래도 ‘생일’이라는 게 떠오를 때마다 왠지 모를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 아, 아침에 아내와 아이들이 전화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 준 게 조금 다른 일상이었다.


아내는 오늘도 어제랑 비슷한 일상이었다. 오전에는 집안일과 육아, 오후에는 업무(?)에 따른 외출. 원래 아내와 아이들이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 근처로 오려고 했다. 그쪽에서 저녁도 먹고 그러려고 했는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여의치가 않았다. 가려고 생각했던 식당에 미리 전화를 해 봤다. 함께 사는 가족인데 저녁 식사가 가능한지 물어봤더니, 보건소에 전화를 해 보고 답을 준다고 했다. 지침상으로는 가능하다고 되어 있지만 식당 자체적으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많이 느껴진다. 어느 곳이든.


아내랑 다시 이야기를 해서 그냥 동네 쪽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차피 아내도 사무실까지 나오려면 너무 분주할 것 같았다.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다. 생일인 나에게 스스로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한강을 건너야 하는 직장인에게 ‘10분 일찍’은 생각보다 큰 결과의 차이를 유발하기도 한다. 오늘이 그랬다.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곳에 엄청 빨리 도착했다. 내가 거의 도착했을 때쯤에 아내는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한참 전부터 올해 생일에는 자기들도 아빠 선물을 사 줄 거라며 벼르고(?) 있었다. 덕분에 소윤이는 얼마 전부터 용돈을 받기 시작했다. 시윤이는 아직 용돈은 없지만 아빠의 선물을 사기 위한 특별 자금(?)을 받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까지도 그걸 사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그것도 산다고 했다.


난 먼저 도착해서 휘이휘이 한 바퀴 돌며 구경도 하고 앉아서 휴대폰 게임도 했다. 가기로 한 식당에 출입도 되는지 미리 물어봤다. 역시나 큰 쇼핑몰이라 가족관계증명서만 보여주면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안 된다고 하면 포장만 해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내가 도착했다면서 전화를 했다.


“여보. 애들이랑 선물 사고 내려갈게”


잠시 후에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그 앞에 앉아 있지”

“아, 우리가 거기 바로 옆에 있는 데서 케이크도 살 거 거든. 여보 앞에 나와서 앉아 있는 건 아니지?”

“앞에 나와 있는데”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서 기다려줘요”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빠에게 깜짝 선물을 주는 느낌을 주기 위한 연출이랄까. 소윤이와 시윤이가 이동하는 동선에 노출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아내와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가 나타났다.


“아빠. 기대해요. 우리가 뭐 샀는지”

“그래,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 뭐 샀는지 알아여?”

“아니, 모르지”


소윤이는 오래전부터 뭘 사 줘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소윤이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넌지시 ‘펜이 필요하다’고 얘기해 줬다. 가지고 있는 펜이 갑자기 다 안 나와서 정말 필요하기도 했고 소윤이의 재정 규모를 고려했을 때 금액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뭘 샀을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렇다고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실제와 연기의 중간쯤이었다. 소윤이는 ‘아빠 궁금하지 않냐, 기대해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우리가 먹기로 한 건 수제버거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햄버거를 먹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줘 봤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좀 크고 나서는 몸에 좋지도 않은 걸 굳이 주지도 않았고. 항상 다른 걸 사서 따로 먹이거나 그랬는데 오늘은 그냥 같이 먹기로 했다. 특별한 날이기도 했지만, 뭐 다른 걸 사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아내도 피곤했고 나도 피곤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걸 오늘 알게 됐다. 둘 다 아주 잘 먹었다. 밀크셰이크에 감자튀김도 아주 맛있게 찍어 먹고. 서윤이가 문제였다. 서윤이를 먹일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따로 준비한 것도 없었다. 아내가 물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 오면서 진공포장된 찐 고구마를 하나 사 왔다. 대책 없었던 아내와 나에게 신의 한 수가 된 고구마였다. 그 고구마 덕에 서윤이가 자비롭게 우리를 기다려줬다.


밥 먹고 카페도 들를까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그 시간에 연 카페도 별로 없어서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서 커피만 한 잔씩 샀다. 아내와 나도 피곤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엄청 피곤했다. 다들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집에 도착해서 식탁에 조각 케이크를 놓고 초를 꽂았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선물을 공개했다. 소윤이는 삼색 펜과 편지, 시윤이는 초콜렛과 알파벳 스티커. 이렇게 커서 아빠 생일 선물을 사 줄 생각을 했다는 게 참 기특했다. 선물을 고르는 과정을 아내에게 나중에 들었는데, 아이들답게 순수했다.


소윤이는 펜을 고르다가 일본산 삼색 펜들의 가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4,500원? 엄마. 이런 게 이렇게 비싸여?”


공격적인 물가에 흠칫 놀란 소윤이는 잠시 후 기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이건 1,500원밖에 안 해여”


소윤이의 소중한 용돈으로 산, 인생 첫 아빠의 선물은 국산 삼색 펜이었다. 시윤이는 아빠가 좋아하는 초콜렛을 일단 골랐다고 했다. 아내는 대충 그렇게 끝내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집요하게 ‘이제 얼마가 남았냐’며 추궁했다고 했다. 아내는 결국 실토를 했고 시윤이는 기어이 그 돈에 맞춰 선물을 더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고른 게 알파벳 스티커였다. 거기에 편지가 있었다. 소윤이는 자기가 쓰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걸 못 썼다며 아쉬워했지만 충분히 감동이었다. 소윤이의 편지를 받고 아무렇지 않았던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아직 글을 모르는 시윤이는 역시나 그림편지. 시윤이의 해설이 곁들여졌다. 약간 즉석에서 해설을 만들어 내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시윤이가 사 준 알파벳 스티커는 노트북에 붙였다. 내 이니셜, 아내 이니셜, 삼남매 이니셜 이렇게.


무척 피곤했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나니 묵직한 피로감이 나를 눌렀다. 아내도 비슷해 보였다. 목요일이라서 더 그랬나. 거기에 퇴근 시간도 굉장히 늦어졌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갔을 때가 이미 10시였다. 그때는 애들도 거의 반수면 상태였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고, 아이들은 아내와 자러 들어갔다.


난 싱크대에 남은 설거지를 했다. 오늘은 물론이고 이번 주 내내 바쁘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낸 아내는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서 나오지 못했다. 덕분에 생일의 마지막 2시간을 하나도 쓸쓸하지 않고 외롭지 않고 심심하지 않게 혼자 여유를 즐기며 보냈다. 아내는 자정이 넘어서 겨우 깨서 나왔다.


“여보. 생일 지났네? 생일 축하해”

“여보. 오늘 내 생일 맞지?”


아내랑 나는 킥킥대며 일력상으로는 지났지만 관습법상 ‘자기 전이면 오늘’인 것에 따라, 아직 지나지 않은 생일을 조금 더 즐겼다.


“여보. 미역국도 못 끓여줬네”


괜찮다. 미역국 따위 없어도 된다. 미역국 백 그릇, 천 그릇보다 아내가 사 준 사과시계가 훨씬 더 좋다. 미역국 감성 대신 사과 감성을 장착했다. 나의 사과 생태계를 창조해 주는 조물주 아내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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