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그렇게 입고 간다구여?

21.09.06(월)

by 어깨아빠

월요일을 앞둔 밤이었음에도, 어제 아내와 내가 늦은 시간까지 드라마 시청을 시도했던 이유가 있다. 오늘 휴가를 냈다. 방구석 데이트를 완주하지는 못했어도 기상의 부담 없이 잠들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쉬는 날이라고 늦잠을 자는 건 어렵지만 시간 맞춰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건 너무나 좋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연차인 건 미리 알리지 않았다.


“엄마. 엄마. 아빠가 아직도 주무세여”

“그래? 아빠 늦으신 거 아니야? 소윤이가 얼른 깨워”

“아빠. 일어나여. 늦었어여”

“어? 그래? 아, 늦었네”


연기를 시작했다. 아내도 거들었다.


“여보. 늦었어. 얼른 나가야지”

“어, 알았어. 음냠냠냠”


잠에서 깨지 못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반바지에 민소매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 그대로 가방을 멨다.


“얘들아. 아빠 다녀올게”

“아빠. 그렇게 입고 간다구여?”

“어, 늦었으니까 얼른 가야지. 아빠 간다. 안녕”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배웅했고 서윤이는 뭣도 모르고 신나서 손을 흔들었다.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일부러 작은방 창문을 지나쳐 걸었다. 정말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1분 정도 기다리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까보다 더 벙 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빠가 진짜 출근하는 줄 알고 아빠가 차 타고 가는 걸 보려고 베란다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오늘 휴가 냈지롱”

“아 뭐에여”


오늘은 좀 멀리 나가기로 했다. 망원동에 있을 때 자주 가던, 지금은 성수동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점심을 먹고 서울숲에 가기로 했다. 낮 시간이라 많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시간이나 걸렸다. 점심시간에 걸쳐서 직장인이 엄청 많았다. 아내는 예전에 혼자 애 셋을 데리고 비슷한 시간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소감을


“내가 어찌나 이방인 같던지”


라고 말했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집 앞을 나갈 때처럼 너무 추레하지 않고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닌가. 현지인(?)처럼 자연스러운 복장이 더 느낌적인 느낌을 연출하는 거였나. 아무튼 사람이 많아서 자리가 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다행히 우리에게 딱 맞는, 구석의 넓은 자리에 앉게 됐다.


서윤이는 먹을 게 없으니 집에서 미리 주먹밥을 싸 왔다. 서윤이는 아내가 하나씩 놓기가 무섭게 집어먹었다.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오기 전에 이미 서윤이는 식사를 거의 다 마쳐가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아내와 나처럼 ‘진짜 맛있게’ 먹는 건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입에는 가지와 루꼴라, 바질페스토 같은 게 들어간 샌드위치보다는 햄에그 샌드위치가 더 맛있을 거다. 아내와 나처럼 감동하며 먹지는 않았다. 비스코티도 주고 초코 쿠키도 줬다. 소풍이니까.


사실 소윤이와 시윤이는 1분 1초라도 빨리 서울숲에 가고 싶어 했다. 샌드위치 따위는 두 녀석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는 ‘가족 데이트 시간이란, 나만 좋고 즐거운 걸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즐겁고 좋기 위해서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 시간’이라며 샌드위치 가게에서의 시간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솔직히 너무 맛있다. 샌드위치도 너무 고급스럽고 맛있지만 비스코티가 정말 최고다. 성수동이 어디 집 앞 놀이터도 아니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와 보겠나.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니 서윤이가 배출을 했다. 내가 데리고 가서 처리해 주려고 했는데 고맙 아니 다행 아니 안타깝게도 남자 화장실이 만원이었다.


“내가 데리고 가서 씻길까?”

“그럴래? 자리가 금방 안 날 거 같아”


아내가 서윤이를 데리고 갔다. 부모의 사랑은 위대하지만 비위까지 뛰어넘지는 못한다. 극한상황이면 모를까 평상시에는. 아내는 몇 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사랑하는 막내딸의 청결한 엉덩이를 위해 헌신했다.


“아빠. 서울숲은 언제 가여어”

“이제 갈 거야. 여기서 엄청 가까워”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도 샀다.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아내가 커피를 사러 간 사이에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 약 2시간 뒤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살짝 불안했다. 서울숲에 가자마자 비라도 내리면,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휴가 때마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소윤이와 시윤이는 딱 한 번 서울숲에 와 봤다. 난 처음이었고.


“아빠. 엄청 재밌는 놀이터가 있어여. 막 빙빙 돌아가는 거 그것도 있고”

“그래? 엄청 재밌겠는데?”


당장이라도 빗방울을 내뿜을 것 같은 하늘을 수시로 올려다보며 부지런히 아이들과 놀았다. 어른의 눈에는 놀이터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애들은 아닌가 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았다.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앉거나 서고, 밖에서 누군가가 힘차게 돌려주면 뱅글뱅글 돌아가는 놀이기구도 있었다. 무게가 꽤 무거워서 온 힘을 다해 돌려도 생각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쉬지 않고 뛰며 돌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재밌어했다.


실컷 놀다가 잠시 쉬며 간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시윤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잘 놀던 녀석이 갑자기 졸리다면서 기운이 없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저혈당 증세를 보일 때처럼 입술에 핏기도 없었다.


“시윤아. 몸이 어디가 안 좋아?”

“아니여. 그냥 졸려여”

“아픈 건 아니고?”

“네. 졸려여. 자고 싶어여”


뭔가 이상했다. 너무 갑자기 달라졌다. 아픈 건 아니라고 하니 뭔가 조치를 할 게 없었지만 분명히 달랐다.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건가’하는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저거 너무 오래 타서 그런 거 아니에여? 어지러워서?”

“아, 그렇네. 그건가 보다. 맞네 맞네”


소윤이 덕분에 실마리가 풀렸다.


“시윤아. 어지러워?”

“네”

“저거 타고 나서부터 그랬어?”

“그런 거 같아여어”

“토할 거 같아?”

“아니여. 토할 거 같지는 않아여”

“속이 울렁거려?”

“네”

“그래. 알았어. 잠깐 앉아서 쉬고 토할 거 같으면 얘기해. 괜찮으니까”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시윤이 옆에 앉아서 대기했다. 시윤이의 입술은 여전히 창백했고 기운도 없었다. 토할 것 같지는 않다던 시윤이가 갑자기 토할 것 같다고 하길래 잽싸게 비닐봉지를 입에 갖다 댔다.


“우에에에엑. 꾸에에에에엑”


아내와 소윤이는 차마 시윤이 쪽을 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시윤이의 토사물을 열심히 관찰했다. 멀미가 분명했다. 저작 작용과 연동작용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난 상태의 토사물이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아무튼 시윤이의 입술을 바로 붉은색을 되찾았다. 당연히 상태도 좋아졌고.


그때쯤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꽤 굵은 빗방울이 아주 드물게 떨어졌다. 비를 피하기에는 약간 애매했고 그렇다고 계속 맞기에도 애매했고. 일단 계속 놀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똑똑똑똑 떨어졌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비를 좀 맞더라도 더 놀게 했다. 시윤이의 멀미 덕분에 한풀 흥이 꺾이고 차분해진 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엄청 아쉬워했을 거다.


“아빠. 다음에는 우리 새벽 6시에 일어나자마자 오자여”

“그래. 다음에는 진짜 일찍 와 보자. 또 올 기회가 있으면”


집 근처였으면 얼마든지 더 놀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성수동에서 집까지 가려면 최대한 퇴근 시간을 피해야 했다. 안 그러면 도로 위에서 2시간 넘게 보낼지도 모르니까. 그런 이유로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중간에 너무 졸려서 아내랑 운전 교대를 하고 조수석에 앉아 달콤하게 잤다. 덕분에 피로가 좀 풀렸다.


저녁은 돈까스를 먹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일이었다. 원래 돌아오는 길에 뭔가를 사서 집에서 먹을까 하다가 충동적(?)으로 밖에서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가족 모두가 좋아하고 만족하는 돈까스 가게에서.


언제나 관건은 서윤이다. 다행히 적절한 배고픔과 적당한 식량 공급으로 식사 시간 내내 크게 부산스럽지 않았다. 소윤이는 이곳의 치즈 돈까스를 엄청 좋아한다. 올 때마다 새삼 느낀다. 오늘도 어찌나 잘 먹는지


“저는 치즈 돈까스랑 밥만 먹을래여”


라고 선포하고는 정말 다른 건 손도 안 대고 치즈 돈까스만 먹었다.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을 정도로, 맛있어하고 좋아하면서. 마지막 두 조각이 남았을 때 일단 한 조각을 소윤이에게 줬다. 소윤이가 포크로 돈까스를 집어 올리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윤이는 정말 서럽게, 엄마와 아빠에게 혼났을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소윤아. 괜찮아. 여기 한 조각 남았잖아. 이거 먹어. 괜찮아 괜찮아”


정말 속상했나 보다. 소윤이가 치즈 돈까스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소윤아, 시윤아. 벌써 하루가 갔네?”

“아빠. 다음에는 우리 일어나자마자 나가자여”

“그건 너무 피곤하지. 아빠도 좀 자야지”

“그래도여. 너무 아쉬워여”


시윤이는 아빠랑 너무 조금밖에 못 놀아서 아쉽다면서, 맨날 쉬라고 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맨날까지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꽤 많이 쉬고 많이 노는 아빠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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