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7(화)
하루를 더 쉬고 출근한 덕분에 월요일 같은 화요일이었지만, 그만큼 정신이 없기도 했다. ‘아내도 나와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얼른 집에 가서 애들 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요즘 소윤이와 시윤이, 거기에 서윤이까지 퇴근 시간 무렵에 베란다에 나와 아빠 차가 들어오는지 볼 때가 많다. 보통 차에서 내리면 저 위에서 ‘아빠’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위를 살폈다. 10층이나 올려다봐야 하니 정확히는 안 보여도 누군가 서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선루프를 열고 먼저 손을 흔들었다.
“아빠아아아아”
소윤이, 시윤이 목소리가 들리고 서윤이 목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에게 손 흔들다가 차바퀴를 연석에 긁었다.
문을 열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서윤이를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고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8자리를 다 누르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모두 현관 앞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서윤이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두 팔을 뻗어 올리며
“아나. 아나아아”
라고 말을 했다. 점점 말과 행동을 겸비한 완성형 인간이 되고 있다.
아내는 카레를 만들고 있었는데 다 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과 ‘힘을 내서’ 놀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지는데 갑자기 잠깐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 일종의 심부름 대행을 해야 했는데 아내는 자기가 나갔다 올 테니 아이들과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아니야. 여보. 내가 애들 데리고 나갔다 올게. 아직 저녁 되려면 시간 좀 남았잖아”
한살림에 가서 장을 보고 약국에 가서 영양제를 샀다. 약사 선생님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아주 친절하고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은 남자분이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아빠 힘들겠네. 대단하다. 대단해”
적당히 웃음으로 대답했는데 다시 말을 이으셨다.
“저도 딸이 셋이에요. 옛날 생각나네. 그래도 그때가 좋죠”
그러더니 자양강장제 한 병과 피로회복제 한 알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대단하신 거야. 드시고 힘내세요”
엄청 유쾌하고 좋은 기운을 전해주시는 분이었다. 자양강장제와 피로회복제 때문이 아니라 그분 때문에 잠시나마 웃으며 피로를 잊었다.
혹시나 비가 올까 봐 서윤이를 아기띠로 안고 나왔는데 이 녀석 기분이 엄청 좋았다. 나에게 매달려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콕콕 박으면서 장난도 치고, 날 올려다보며 뭐라고 종알거리기도 하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바람도 무척 시원했다.
볼 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알람이 울렸다.
‘목장 모임 8시’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잠깐 잊었다. 집에 도착해서 부지런히 저녁을 먹고 목장 모임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거실에서 하다가 나도 방해가 되고 애들도 나 때문에 괜히 더 조심할 것 같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목장 모임을 하는 동안 바깥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다. 시윤이가 서럽게 우는소리, 아내가 누군가를 따끔하게 혼내는 소리, 꾹 참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아내의 목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 아내와 아이들은 나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목장 모임도 10분 안에 끝날 것 같아서 잠깐 기다렸다가 인사하자고 하려다가, 그냥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뒤에 선 아내의 표정이 너무 지쳐 보였다.
목장 모임을 마치고 나와서 설거지부터 했다. 거실에는 젖은 빨래가 쌓여 있었는데 차마 그건 손을 대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서 1분 정도 빨래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혹시나 몰라서 발을 뻗어 다시 한번 확인해 봤다. 젖은 빨래였다. 건조기 안에는 다 마른 또 다른 빨래가 있다는 거였고, 젖은 빨래를 넣으려면 마른 빨래를 꺼내고 먼지 필터도 깨끗하게 하고 물통의 물도 버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너무 커 보였다. 빨래 더미 너머의 산을 본 느낌이라. 거실의 그 빨래가 마른 빨래였다면 조금 더 마음을 쥐어짰을 텐데.
아내는 엄청 늦게 나왔다. 서윤이가 엄청 안 잤다. 아내는 나와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로미오의 죽음을 확인한 줄리엣처럼 절망스럽게 소파로 쏟아지며 말했다.
“하아. 벌써 열시 반이라니”
빨래에 손을 대지 않은 게 더 미안했다. 착한 아내는 빨래는 언급도 하지 않고 깨끗한 싱크대를 보며 나에게 얘기했다.
“여보. 설거지해 줘서 고마워”
뭐지. 내 앞에서 왜 천사가 얘기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