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1(토)
소윤이랑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원래 7월에 했어야 했는데 무더위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밀리다가 비로소 오늘, 하기로 했다. 소윤이는 엄마와의 데이트를 기다렸던 것처럼 나와의 데이트도 그렇게 기다렸다. 신기했다. 아침에 (내) 엄마가 소윤이와 통화를 하면서 장난으로 ‘할머니도 데이트에 끼겠다’고 하니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했다고 했다. 아빠와의 데이트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치과에 가는 날이었다. 아내가 먼저 차를 가지고 치과로 갔다. 나는 나머지 준비를 마친 뒤 세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뒤따라 갔다. 날이 생각보다 더웠다. 서윤이를 아기띠로 안고 걷는데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소윤아. 오늘 덥다”
“그러게여. 덥다여”
아내는 우리가 치과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치료를 끝내고 나왔다. 아내를 만나서 시윤이와 서윤이를 넘겼다.
“여보. 갔다 올게. 시윤아, 서윤아. 안녕”
그렇게 우리의 첫 데이트를 시작했다. 시윤이가 태어났을 때 소윤이와 동물원도 가고 야구장도 가고 그랬지만 그때는 데이트보다 육아에 가까웠다. 오늘은 완연하게 데이트 기분이 났다. 소윤이를 돌봐야 한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고, 같이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이런 걸 고민하며 즐거웠다.
아침을 굶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소윤이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왔다.
“소윤아. 아빠 배가 너무 고파. 뭐 좀 먹어야겠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서 초코 우유 하나와 에너지바 하나를 샀다. 소윤이하고 나눠 먹으며 급하게 허기를 달랬다.
박물관을 갈까 뮤지컬을 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다 접고 그냥 밥 먹고 서점 가고 카페 가고 걷고 그러기로 했다. 소윤이는 그런 데이트에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둘이 나란히 앉아서 점심으로 뭘 먹을지를 고민하며 찾아봤다. 내가 여기저기 후보지를 얘기했는데 소윤이가 대답했다.
“아빠. 그때 그 김치찜 집은 멀어여?”
“김치찜? 그때 가서 먹었던 곳?”
“네”
“아니. 거기도 우리 가는 길이야. 멀지 않아. 그거 먹고 싶어?”
“네”
“김치찜 안 맵겠어?”
“그때도 고기만 잘 발라서 먹었어여”
“알았어. 그럼 거기 가자”
혹시 몰라서 찾아봤는데 평이 너무 안 좋았다. 모르고 갔으면 갔지 그런 평을 보고 나니 괜히 찜찜했다. 안국역 근처 김치찜 가게를 검색해서 평이 괜찮은 곳을 찾았다.
“소윤아. 그때 갔던 데 말고 여기 가자”
“왜여?”
“아, 거기는 평이 너무 안 좋네. 여기도 맛있대”
“거기도 안 멀어여?”
“어. 원래 우리가 내리려던 역에 있는 곳이야”
사실 점심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내가 너무 배가 고프기도 했고, 저녁도 맛있는 걸 먹으려면 점심을 조금 일찍 먹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소윤이는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부른 것도 아니라서 조금 일찍 먹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나처럼 딸과 함께 데이트를 하러 나온 아빠가 있나 살펴봤는데 자주 보지는 못했다. 괜히 뿌듯했다. 엄청 예쁜 여자친구(이를테면 우리 아내 같은)와 데이트를 할 때처럼 뭔가 자랑스러웠다.
일곱 살 딸과의 첫 끼니가 김치찜이라는 게 나도 신기했다. 팔팔 끓는 묵은지 사이에서 살코기를 건져 올렸다. 최대한 국물이 묻지 않도록 속살을 조심스럽게 발라서 소윤이의 그릇에 놔 줬다.
“소윤아. 먹을만해? 맵지 않아?”
“네. 조금 맵긴 한데 밥이랑 같이 먹으면 괜찮아여”
“많이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소윤이는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적절한 자세와 웃음으로 받아줬다. 아내하고는 어디를 가도 조금의 불편함이나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데, 소윤이하고도 그랬다. 세상 그 누구하고 있어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었다. 둘이 자주 마주 보고 웃었다.
소윤이는 밥 먹는 게 영 시원찮았다. 역시 배가 너무 안 고팠던 모양이다. 난 금세 한 그릇을 싹 비웠다.
“소윤아. 배가 너무 안 고팠어? 배부르면 그만 먹어도 돼”
“조금 더 먹고여”
소윤이에게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윤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정말 나와 보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거워했다.
밥 먹고 나서는 서점에 가기로 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까지 걸어서 25분이었다.
“소윤아. 한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걸을 수 있겠어?”
“좀 멀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여”
소윤이와 함께 조계사 뒤쪽의 고즈넉한 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날이 은근히 더워서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그늘 아래서 바람을 맞을 때는 무척 시원했다. 소윤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사진도 찍고.
“아빠. 우리 셀카도 찍자여”
“그래. 이리 와 봐”
30분이었으니 정말 꽤 한참 걸었다. 중간에 소윤이를 업어주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시작할 때의 각오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다시 내려줬다.
“아빠. 너무 무거워여?”
“그러게. 소윤이 진짜 많이 컸네”
소윤이는 걸으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참 많이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으니 차근차근 대답도 했다.
서점에서는 서로의 선물을 사기로 했다. 난 소윤이에게 책을 선물했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재밌게 읽은 ‘샬롯의 거미줄’이었다. 소윤이의 요청이었다. 내 선물을 뭘 살지는 가서 정하기로 했다. 소윤이가 모은 용돈에서 사는 거라 적정 가격은 3,000원에서 4,000원이었다. 아빠도 책을 고르고 부족한 돈은 보태겠다고 했더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아빠. 그건 선물이 아니에여. 다 제 돈으로 사야져”
책갈피, 스티커 등이 후보 물품이었다. 소윤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티커 종류에 놀라면서도 하나하나 살펴보는 걸 즐기는 듯했다. 소윤이의 모습에서 아내가 보였다. 아주 작은 걸 사더라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그 과정을 즐기는 모습이 판박이였다.
일단 내 선물은 책갈피로 정했다. 그다음은 시윤이 선물이었다. 그걸 고르는데도 한참 걸렸다.
“시윤이는 자동차 장난감을 제일 좋아하겠지만 그건 엄마, 아빠가 안 사주시니까 저도 못 사 주져”
시윤이 선물은 스티커로 골랐다. 소윤이는 진심으로 시윤이가 받고 기뻐할 선물을 고심했다. 소윤이와 서로에게 편지를 써 주기로 했는데 그 편지지를 고르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서점에서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앉지 않고 계속 서서.
선물을 다 고르고 나서 잠시 바깥의 의자에 앉아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남산에 갈까 카페에 갈까 청계천에 갈까 하다가, 일단 카페에 가서 좀 쉬기로 했다. 소윤이도 나도 굉장히 즐겁고 만족하고 있었지만, 다리가 아프고 힘들긴 했다.
카페는 안국역에서 교보문고로 올 때 봤던 곳으로 갔다. 소윤이를 위한 청귤에이드 한 잔과 브라우니, 나의 아이스아메리카노 이렇게 주문했다.
“아빠. 왜 데이트 할 때는 다 된다고 해여?”
“데이트니까. 맨날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소윤이는 말만 하면 그대로 해 주는 아빠가 좋으면서도 신기했나 보다. 카페에 앉아서는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소윤이는 쓰면서
“아빠. 보면 안 된다여. 알았져?”
“알았어”
소윤이는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뭐라고 쓰는지 궁금했지만, 약속했으니 훔쳐보지는 않았다. 다 쓰고 나서 봉투에 넣고, 집에 가서 보기로 했다.
“아빠. 왜 집에 가서 봐여?”
“그냥. 뭐라고 썼을지 궁금하고 기대도 되고. 재밌잖아”
편지를 다 쓰고 나서는 둘이 마주 앉아 특별한 걸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책도 살펴보고 그랬다. 시윤이가 사진 찍을 때 왜 그렇게 어색하게 웃는지, 서윤이는 요즘 왜 그렇게 고집이 세졌는지, 동생들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막상 없으니 왜 이렇게 어색한지, 엄마와 동생들은 뭘 하고 있을지.
“소윤아. 카페에서 그냥 이렇게 앉아서 얘기하는 것도 좋아?”
“그럼여”
“뭐가 좋아?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빠랑 같이 있는 게 좋져”
그동안 소윤이와 시간을 쌓기 위해 노력한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내심 엄청 보람찼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이날이 얼마나 그리울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딴 생각 다 집어치우고 그냥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겨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남산도 갈까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이동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간이 조금 아까웠다. 소윤이도 남산을 궁금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 가고 싶어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소윤아. 어떻게 할래? 아빠는 상관없어. 소윤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음, 그럼 일단 집 쪽으로 가자여. 거기서 산책을 하자여”
“그럴까?”
“네. 근데 동생들 만나면 어떻게 하져?”
“왜?”
“그럼 데이트가 끝나잖아여”
“아니야. 만나도 다시 헤어지면 되지. 그리고 안 만날 거야”
카페에서 나와 다시 안국역으로 걸어갔다. 안국역에 도착해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반대편에 인사동 거리가 보였다.
“소윤아. 인사동 구경할래?”
“인사동이 뭐에여?”
“아, 그냥 거리인데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아”
“그래여”
“다리 안 아파? 괜찮아?”
“네. 아직 괜찮아여”
소윤이의 감성(?)에 맞는 풍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주 보지 못하는 모습이 많으니 재밌어 하긴 했다. 소윤이는 꿀타래 만드는 것과 달고나 만드는 걸 아주 재밌게 구경했다. 꿀타래 만드는 건 다 구경을 하고 나서도 그 앞을 떠나지 않길래 소윤이에게 물어봤다.
“소윤아. 저거 먹고 싶어? 하나 살까?”
“아니여. 먹고 싶지는 않아여. 그냥 너무 재밌어여. 너무 신기해여”
소윤이는 집에 올 때도 꿀타래 얘기를 참 많이 했다. 단단하게 굳은 꿀이 실처럼 변하는 게 너무 신기했나 보다. 난 예전에 봤던 건데도 신기하긴 했다.
사진 찍는 곳이 있길래 들어갔다. 우리 때(?)의 스티커 사진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코로나 시대의 인간들 아니랄까 봐, 처음 2-3컷을 마스크 벗는 걸 잊고 찍었다.
“소윤아. 마스크 벗어 마스크”
10장을 찍고 그중에 6장을 고르는 거였다. 소윤이가 나보다 사진을 잘 찍었다. 표정도 다양하고, 자세도 다양하고. 소윤이는 사진을 소중하게 봉투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어느 공예품 가게에 들어가 아내(엄마)에게 줄 집게핀도 샀다.
“소윤아. 낙원상가도 구경할래?”
“낙원상가가 뭐에여?”
“저기 가면 악기가 엄청 많아”
“제가 못 본 악기?”
“음, 그런 것보다는 피아노나 기타, 드럼 이런 게 엄청 많아. 아빠는 예전에 자주 갔거든”
“아빠도 칠 수 있어여?”
“아니. 아빠가 치지는 못하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쳐여?”
“그런 사람들도 있지”
“지금은 그냥 가자여”
“그럴까? 다리 아프지?”
“네. 조금”
나도 다리가 아팠다. 소윤이도 나도 운동화를 안 신어서 발이 영 불편했다. 시간도 많이 흐르기도 했고. 집에 오는 길에는 지하철에서 앉지도 못했다. 소윤이는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여전히 이것저것 물어보며 30여 분의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완전히 집 근처로 왔다. 평소에도 자주 나가던 상가 광장에 앉아서 바람을 맞았다. 소윤이는 아까 산 책도 보고, 찍은 사진도 보고 그랬다. 난 옆에 앉아서 소윤이를 보거나 다른 사람들을 구경했다. 소윤이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침묵이 길어지기도 했다. 긴 침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난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을 좋아하고, 편안하다. 나에게 친밀함의 기준이란 ‘침묵을 깨기 위한 고민이 없어도 되는지 아닌지’다. 소윤이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침묵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딸과의 데이트에 젖어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소윤이와 나는 가끔씩 눈을 마주치면 아무 말 없어 웃고 다시 고개를 돌리곤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쌓인 피곤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눈꺼풀을 잡아당겼다.
“소윤아. 우리 이제 또 잠깐 걸을까? 다리 괜찮아?”
“네 괜찮아여”
맨날 걷는 동네지만 소윤이와 둘이 걷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소윤이는 걸을 때 꼭 내 손을 잡았다.
저녁도 맛있는 걸 사 주려고 했는데 배가 안 고프다고 했다. 카페에서 큰 청귤에이드 한 잔과 브라우니를 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겠다고 하길래 하나만 먹어도 배가 차겠냐고 물었는데, 오늘은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햄치즈 샌드위치, 오미자 주스, 감귤 쭈쭈바를 사서 아파트 놀이터로 갔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와 주스를 먹고, 쭈쭈바를 먹었다.
“와, 소윤아. 어느새 시간이 벌써 이렇게 갔네”
“아, 그러게. 너무 아쉽다. 아빠. 하루가 이틀 삼일이었으면 좋겠어여”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하루가 너무 빠르니까 이틀 삼일처럼 길었으면 좋겠다고여”
놀이터에서도 시간을 조금 더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저녁에 온라인 모임이 있어서 그 시간에 맞춰서 들어왔다. 건물 입구를 막 들어가기 전에, 소윤이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허리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아. 너무너무 아쉽다. 안 들어가고 싶다”
“왜?”
“아빠랑 데이트 끝나서여”
“다음에 또 하면 되지”
“아빠 10월에도 또 하자여”
“그래. 나중에 아빠랑 둘이 여행도 가자”
“아빠. 진짜. 진짜. 꼭 가자여”
아내와 서윤이, 시윤이보다 우리가 먼저 집에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도 바람 쐬러 나갔다가 우리가 들어오고 한 5분 있다 돌아왔다. 떨어져서 데이트 한 시간이 행복했던 건, 다시 만날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고작 6-7시간인데, 참 반가웠다. 모두.
“아빠. 오늘 저는 너무너무 좋았어여. 오늘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로”
“소윤아. 아빠도 마찬가지야. 너무 좋았어. 너무 재밌었고. 다음에 또 데이트하자”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아빠와 보내는 시간을 이렇게도 귀하게 여겨주니.
“여보. 계속 생각나네”
“뭐가?”
“소윤이랑 데이트 한 거”
“그래? 좋았나 보네”
“좋았지. 소윤이는 진짜 별거 안 해도 좋아하더라”
“맞아”
소윤이하고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진짜 데이트 한 기분이네. 데이트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