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6(목)
서로 바빠서 거의 연락을 못하고 낮에 두 번 정도 통화를 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다고 했다. 일단 아내가 비염 증상이 너무 심했다. 가끔 비염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길고 깊었다. 아내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될 정도였다. 소윤이도 마찬가지로 비염이 심했고(안쓰럽게도 비염은 항상 심하다) 눈에 다래끼가 났다. 서윤이는 목 주위의 피부가 울긋불긋하고 우둘투둘하게 일어났다. 시윤이만 멀쩡했네.
아내는 병원에 다녀와서 결과를 말해줬다. 아내는 코 안쪽이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그만큼 코 안쪽이 붓고 헐었다는 얘기라고 했다) 비염이 심하고, 소윤이의 다래끼 또한 비염과 연관이 있는데, 눈이 가려우니까 자꾸 비비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균이 들어간 거라고 했다. 서윤이의 피부는 심각한 건 아니지만 더 심해질지도 모르고 관리 차원에서 약을 적당히 발라주면 된다고 하셨고.
퇴근해서 들어 보니 아내가 병원에 처음 갔을 때, 대기 인원이 15명이나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은 코로나 백신을 맞으러 온 사람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배려로 아내가 먼저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고 했다. 당시 아내의 상황은 혼은 소멸하고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막상 들어 보면 언제나처럼 ‘일상의 버거움’이 큰 이유겠지만) 아내는 이미 매우 지친 상태로 병원에 간 거였다. 대기 인원이 15명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다소 얼이 빠졌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거다.
아내는 카톡으로도 ‘힘들다!!!!!ㅋㅋㅋㅋㅋ’라고 보내기도 했고, 애들 재우고 나와서도 ‘아, 오늘 하루 진짜 힘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아내가 어제인가 그제인가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내가 필터링을 많이 해서 그렇지. 하아, 진짜 많은 일들이 있다”
오늘도 아내는 세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세우느라 자기의 것을 갈아 넣었나 보다.
집에 들어가니 오늘은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 순으로 줄을 서 있었다. 보통은 소윤이가 동생들에게 양보를 하는데 오늘은 가장 앞에 와서 섰다.
“아빠”
“아이고. 소윤아. 잘 지냈어? 사랑해”
“아빠아”
“시윤아. 시윤이도 잘 지냈어? 사랑해”
서윤이는 언니와 오빠의 차례일 때도 이미 두 팔을 벌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빠아아아아아. 나나나나나나”
“서윤아. 아빠 보고 싶었어?”
“음마아아아아”
“보고 싶었어?”
“아아아아”
“얼만큼?”
“마아아아아”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한다. 그렇게 안아달라며 반기던 녀석이 막상 안아주면 5초도 안 돼 내려가겠다고 난리다. 소윤이, 시윤이 때도 똑같이 겪었던 일이다. 하루 종일 서윤이 생각을 많이 했다. 아니 많이 났다. 원 없이 껴안고 놀고 싶었는데 요즘 너무 도도해서 쉽지가 않다.
시윤이는 내가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아빠 이거 읽어주세여어”
라며 책을 들고 왔다. 바로 ‘그래’라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대신 그럴 생각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 3초 정도 필요했다. 그런 다음 흔쾌히 ‘그래’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 틈을 아내가 비집고 들어왔다.
“시윤아. 아빠가 퇴근하자마자 책 읽어주면 힘드시겠지? 아빠도 잠깐 쉬셔야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부부는 호흡이 중요하다.
잠시 소파에 앉아 달려드는 피로를 걷어냈다. 시윤이가 공놀이(거실에 마주 앉아 테니스 공을 가볍게 주고받는 것)를 하자고 했다.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오라고 해도 오지 않던 서윤이가 자기도 하겠다며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서윤이에게도 적당히 기회를 주며 공을 주고받았다. 나중에는 책을 읽던 소윤이도 합류했다.
밥 먹고 나서 (애들이) 자려고 눕기 전까지, 최대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몸도 쓰고 말도 쓰고 책도 읽어주고. 서윤이만 도도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빠를 어떻게든 활용해서 익스트림을 즐길 궁리를 하는데, 서윤이는 갖은 수를 쓰며 오라고 해도 오지 않았다. 어제 즐겁게 했던 쎄쎄쎄 이야기를 했더니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왔다.
아이들이 처음 골라온 책은 요즘 매일 골라오는 책이었다. 다소 지겨웠다. 내가. 다른 책을 골라오도록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주워 온 자연관찰 책을 가지고 왔다. 흔쾌한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는데 목차가 나왔다. 마지막 쪽수가 40 이었다. 아이들이 ‘아빠가 억지로 읽는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 전에 엔돌핀을 마구 생성했다.
아내는 어제에 비하면 훨씬 일찍 탈출했다. 탈출하고 한 10여 분은 하루의 피로를 채 걷어내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듯했는데, 일정 시간이 경과하자 말과 행동이 오히려 경쾌해졌다. 모든 육아인들이 겪는 신비로운 과정이다.
거기에 꼭 내일이 휴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