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7(금)
ㅇ연휴 전날이었다. 가뜩이나 해가 갈수록 옅어지는 명절 분위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명절이 전혀 명절 같지 않았다. 그래도 연휴의 전날은 언제나 설렌다. 회사의 업무도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을 느슨한 마음으로 처리하며 퇴근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고 나니 사장님께서 조금 일찍 퇴근하라는 지침을 내리셨다. 오후 세 시쯤 사무실에서 나왔다.
당연히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떻게 아내를 놀라게 할지 궁리를 하면서 운전을 했다. 딱히 기묘한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택배가 올 것처럼 문을 쿵 한 번 치고 숨을 죽였다. 아내가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오. 여보오오. 뭐야. 뭐야”
아내는 뭔가 놀라게 하는 맛이 있는 사람이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갑자기 등장한 아빠에 적잖이 놀랐다. 잠깐의 놀람 뒤에는 바로 흥분이 찾아왔다. 시윤이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바로 책을 들고 왔다. 흔쾌히 책을 받아들고 읽어주기 시작했다. 어제도 읽었던 책과 비슷한 40쪽 정도의 책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눈이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옆에서 같이 보던 소윤이가 자리를 뜨더니 책장에 가서 다른 책을 만지작거렸다.
‘저것도 읽어달라고 할 건가. 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읽어달라고 하면 읽어 줄 생각이었지만, 읽어달라고 하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 소윤이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일찍 퇴근했으니 잠깐 밖에 나가든 저녁을 밖에서 먹든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 생각이었다. 아내에게 슬쩍 운을 뗐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두 곳을 후보로 뽑았다. 시윤이가 좋아하는 탕수육, 소윤이가 좋아하는 치즈돈까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얘기를 나누고 조율해 보라고 했다. 한두 번 정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더니 갑자기 둘 다 태도를 바꿨다.
“시윤아. 그냥 탕수육 먹자”
“아니야 누나. 치즈 돈까스 먹자”
이게 원 전래동화에 나오는 의 좋은 형제 같은 모습인지. 소윤이와 시윤이의 배려 넘치는 밀고 당기기는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더니 소윤이가 얘기했다.
“시윤아. 그럼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먹을까?”
“아니. 지는 사람이 먹고 싶은 거”
“그래? 시윤이가 잘 지니까 그래?”
소윤이는 시윤이의 의도를 의심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제비뽑기로 정할까?”
글을 읽지 못하는 시윤이를 배려해 동그라미는 탕수육, 하트는 돈까스로 정하고 동그라미 8개, 하트 8개를 그려서 족지를 접었다.
“소윤이랑 시윤이가 네 개씩 뽑고 엄마가 두 개 서윤이가 한 개 이렇게 뽑으면 돼”
서윤이는 ‘한 개는 무슨 한 개, 난 다 뒤집어엎을 거야’라는 듯 막 달려들었다. 서둘로 쪽지를 뽑고 개표를 했다. 하트가 2-3표 더 많이 나왔다. 시윤이가 막 좋아했다.
“시윤아. 하트는 돈까스야”
“아 그래여어? 아, 알아여”
“알아? 근데 왜 이렇게 좋아해?”
“누나가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으니까”
우리 모두 시윤이를 너무 얕봤다. 기특한 녀석.
바로 준비하고 식당으로 갔다.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아내를 먼저 내려줬다. 아내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난 아이들을 태우고 주차할 자리를 찾아서 주변을 돌았다.
“여보. 아직 자리 못 찾았어?”
“어, 차가 많네”
“여보. 가족관계증명서 있지?”
“어, 있어”
“알았어”
자리가 하나 나서 주차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식당 주인분이 말씀하셨다.
“아, 안 보여주셔도 될 거 같아요”
가족이 아니고는 조합하기 힘든 구성이기도 했을 테고, 절묘하게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섞인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도 했을 테고.
소윤이는 오늘도 너무너무 맛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치즈돈까스를 먹었다. 월남쌈과 함께 소윤이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음식이 아닌가 싶다. 자기는 탕수육만큼 치즈돈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던 시윤이도 누나 못지않게 먹었다. 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는 교회에 가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가 교회에 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바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 시간이 있는 건지. 바로 가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더니 밖에서 조금이라도 놀자고 하길래 그러자고 했다. 일단 집에 주차를 하고 근처를 걷든 놀이터에 가든 하자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커피를 사려고 카페에 들렀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
“아, 시간이 가고 있다. 아빠랑 빨리 더 놀아야 되는데”
“아빠. 왜 이렇게 오래 걸려여? 엄마한테 연락해 봐여”
“아빠. 이제 몇 분 남았어여? 아빠 교회 가려면?”
소윤이와 시윤이는 초조했다. 내일부터 연휴고 수요일까지 출근을 안 하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해도, 당장은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쉬웠나 보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니 한 3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킥보드를 타고 동네 상가 광장으로 갔다.
“아빠. 우리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할까여?”
“음, 그건 땀이 나서 안 돼. 아빠 바로 교회 가야 되잖아”
“그럼 숨바꼭질은여?”
“그래, 숨바꼭질 하자”
남은 시간을 모두 숨바꼭질을 하며 보냈다. 아내와 아이들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 나왔다.
“여보. 애들 기분 좋게 잤어?”
“어, 기분 좋게 잤지”
“되게 좋아하더라”
“그럼. 좋았겠지. 나도 좋더라”
고작 3시간 정도 일찍 집에 온 건데(하긴, 3시간이 고작은 아니지) 많은 게 바뀌는 느낌이다.
내일은 주말이고, 주말이 끝나면 연휴니 마음의 부담이 먼지만큼도 없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드라마(지난주부터 보기 시작한, 종영한 지 몇 년 된 드라마)를 보려고 노트북을 펴고 준비했다. 스페이스바만 누르면 시작하는 상태였다.
서윤이가 먼저 깨서 울었다. 아내는 청귤청을 담그던 걸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아내가 급히 몸을 숨기고 내가 서윤이를 데리고 나왔다. 이 집에 엄마가 없다는 걸 확인시켜 줬는데도 엄마를 찾으며 조금 더 울었다. 그새 좀 컸는지 눈치가 생긴 건지. 그래도 결국은 내 어깨에 기대며 잠을 청했다. 방에 데리고 가서 눕힌 다음 슬쩍 시험해 봤다.
“서윤아. 아빠 나갈게. 코 자”
“아아앙”
“왜. 눈 감고 코 자”
“아아앙”
“아빠도 옆에 누울까?”
“응”
“아빠도 같이 잘까?”
“응”
꽤 한참 토닥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든 느낌은 아니었다. 왠지 금방 깰 것 같았다. 왠지는 역시가 되었다. 서윤이는 또 깨서 울었고 결국 아내가 다시 들어갔다. 아내도 꽤 한참 재우고 나왔다. 아내가 다시 나온 게 신기했다.
결국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자러 들어갔을 법한 시간에 드디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서윤아, 연휴니까 봐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