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단독 심부름

21.09.18(토)

by 어깨아빠


아이들은 계란밥을 먹였고 아내와 나는 딱히 뭘 먹지 않았다. 밥이 없기도 했지만 주말 아침에는 굳이 밥을 챙겨 먹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이랑 이것저것 집어먹을 것(?)을 몇 개 입에 넣는 걸로 대신하는데, 오늘은 집에 집어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아, 여보. 배고프네”

“그러게. 나도 배고프네. 식빵이라도 몇 장 있으면 좋은데”


이런 얘기를 나누다가 농담처럼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심부름을 시켜볼까 하는 말이 나왔다.


“소윤아, 시윤아. 너네끼리 편의점에 가서 식빵 사 올 수 있겠어?”

“네”

“진짜? 괜찮겠어?”

“네”


막상 소윤이가 너무 담담하게 대답하니 오히려 내가 멈칫했다. 먼 거리도 아니고 베란다에서 아이들의 이동을 다 볼 수도 있었다. 나름대로 요즘 더 신경 써서 ‘차도를 횡단하는 방법’을 알려줬던 게 다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시윤이는 그렇다 쳐도 소윤이는 이제 엄마와 아빠 없이 ‘혼자 해 내는 경험’을 쌓아줄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아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일 일부터. 식빵 심부름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카드 한 장을 내어줬다.


“소윤아, 시윤아. 손 꼭 잡고 가. 놓지 말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집을 나서자마자 베란다로 갔다. 아주 하찮은(?) 심부름이어도 어쨌든 소윤이와 시윤이 둘만 보낸 건 처음이니, 아주 조금 걱정도 됐지만 그것보다는 궁금했다. 둘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은 어떨지. 아이들을 기르면서 많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나중에 우리의 품을 떠나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될 때 어떤 모습일지, 서로 남매와 자매로 연결되어서 살아갈지. 그때 ‘잘’ 살라고 지금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다.


내복 차림으로 두 손을 꼭 잡은 소윤이와 시윤이가 보였다. 어른 걸음으로 다섯 걸음 정도밖에 안 되는 차도를 건널 때는 각자 남은 손을 하늘로 쭉 뻗고 양옆을 성실하게 살폈다. 차와 물, 신원미상의 수상한 사람만 없으면 아이들을 내 놔도 걱정할 일이 많이 없을 거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소윤이와 시윤이가 너무 오랫동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식빵 하나 사는 것치고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러고 보니 닥칠지도 모르는 변수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수가 많지는 않았다.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큰 변수는 ‘식빵이 없는’ 상황이었다. 소윤이가 있으니 알아서 잘 대처하고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간이 길어지니 조금 걱정이 됐다. 혹시 잔액이 없는 카드를 잘못 준 건 아닌가 확인을 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결국 편의점에 전화를 해 봤다.


“아, 저기 혹시 거기 애들 둘이 식빵 사러 가지 않았나요?”

“아, 네 맞아요. 식빵이 없어서 단팥빵 하나 사셨…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릴 걸 그랬다. 잠시 후 소윤이와 시윤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윤이는 단팥빵 ‘한 개’를 흔들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파트로 들어갈 때까지 베란다에서 지켜봤다.


“아빠”

“소윤아, 시윤아. 잘 갔다 왔어?”

“네. 식빵이 없어서 단팥빵 사 왔어여”

“아, 그랬어? 잘 했네”


소윤이와 시윤이의 첫 심부름이었다. 약소한 돌발 상황에도 나름 유연하게 대처했다. 단팥빵을 반으로 잘라 아내와 나눠 먹었다.


오전에는 집안일을 하고 점심시간쯤 집에서 나왔다. 아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혔다. 이거라도 입혀야 명절 티가 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작년에 입혔던 게 작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올해까지는 입힐 만했다. 서윤이의 한복은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구성품이 분실된 건지 모르겠지만 팔이 다 드러나는 민소매였다. 바디수트를 하나 입힌 다음 대충 구색만 갖췄다.


문을 열었는데 아이들 한복 차림에 걸맞은 향기가 풍겼다. 막 열을 받은 기름 냄새였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두 자녀의 내외와 손주를 맞기 위한, 소박하면서도 풍성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침을 사연 많은 ‘단팥빵’으로 때운 아내와 나는 출발할 때부터 너무 배가 고팠다. 평소 장모님의 규모답게 여러 영역의 음식이 적지 않게 준비되어 있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전을 집어먹는 아빠의 모습을 본 서윤이가 자기도 달라며 득달같이 달려왔다. 서윤이는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전 네댓 조각을 먹었다. 네댓 조각까지 줄 생각은 없었지만, 한 조각을 다 먹고 나면


“떰떰(또)”


를 외치며 전이 놓인 식탁을 가리켰다.


깊었던 배고픔이 무색하게, 금방 배가 불렀다. 배가 부르니 피곤이 몰려왔다. 어제도 아내와 드라마를 보느라 아주 늦게 잤고, 그 후폭풍이 몰려왔다. 연휴와 할머니, 할아버지 집 방문의 이유로 설레서 일찍 일어난 소윤이와 시윤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소윤이는 전혀 잘 의사가 없었고 시윤이는 조금만 더 설득(?)하면 잘 것 같았다. 아내가 ‘엄마랑 같이 들어가서 눈 감고 누워있기만 하자’는 하급 술수로 시윤이를 방에 데리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장모님은 내게도 들어가서 좀 누우라고 권하셨는데, 괜찮다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눈꺼풀의 하중이 두 배가 됐다.


‘잠깐 누워서 쉬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작은방에 들어갔다. 소윤이와 서윤이가 몇 번 들락날락하면서 안겼다 나가곤 했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고 결국 잃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연 채광의 조도가 바뀌어 있었다. 벽에 붙은 바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는데 믿기지가 않아서 팔에 차고 있던 시계로 다시 확인을 했다.


4시간.


네 시간을 꼬박 잤다. 거실의 조명도 어두컴컴했고, 바닥 한가운데는 서윤이가 누워서 곤히 자고 있었다. 장모님과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보. 일어났어?”

“여보. 나 네 시간 잔 거야?”

“그러게. 푹 잤어?”

“어, 완전. 깨우지”

“자는 김에 피곤 좀 풀라고”

“애들은?”

“아, 나갔어”


아이들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나가게 됐는지 세부 사항을 설명했는데 잠이 덜 깨서 뭐라고 하는지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무튼 소윤이와 시윤이, 형님네 부부, 장인어른이 나갔고 내가 깨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돌아왔다. 소윤이와 시윤이 얼굴의 붉은 기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 그들의 표정으로 유추해 보건대 마음껏 놀고 온 것 같았다. 내가 잔 시간만큼 놀고 온 거니 꽤 긴 시간을 밖에서 보낸 셈이었다. 들어오기 직전에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 작은(혹은 큰) 갈등이 발생한 듯했지만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점심 먹고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무려 4시간) 자고 일어났더니 또 저녁을 먹어야 했다. 피자와 떡볶이를 배달시켰는데 나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먹는 건 허기진 사람처럼 먹었다. 사람의 몸집이 커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잘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내와 나도 재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11시가 넘어서 아내와 방에 들어갔다. 서윤이는 안 자겠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울었다. 거실에서 듣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서윤아. 엄마한테 짜증 내지 말고 이리 와서 곧은 자세로 서세요”


라고 얘기했더니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내 앞에 와서 자세를 잡고 곧게 섰다. 언니와 오빠가 어떻게 하는지 본 게 많아서 그런가 아무리 크게 울며 짜증을 내다가도 금방 태도를 거두고 곧은 자세를 취하곤 한다.


“서윤아. 엄마한테 짜증 내면 이놈이에요. 이제 가서 엄마랑 누워서 자세요. 알았어요?”

“응”


다시 거실로 나온 뒤에도 한두 차례 울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아내가 한참 안 나오길래 잠들었나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잠든 건 아니었다. 나랑 비슷한 시간에 낮잠을 잔 시윤이가 잠이 안 온다고 해서 기다려 준다고 했다. 난 장인어른, 장모님과 앉아서 드라마를 봤다. 평소에 챙겨보는 드라마가 없으니 아무런 기대나 설렘 없이 봤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2회까지 방영한 드라마였다. 오랜만에 챙겨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먼저 주무시러 들어가고 아내와 나는 조금 더 늦게까지(사실은 아주 많이 늦게까지) TV를 봤다. 아내는 발 각질 제거하는데 시간을 많이 썼다(이런 건 너무 자세하게 쓰면 안 되는 건가?). 그때도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난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거대한 낮잠의 여파였다. 아내와 함께 방에 들어가고 난 뒤에도 자지 않았다. 누워서 휴대폰을 보는데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결국 어둠이 광명으로 바뀔 무렵까지 깨어 있었고, 애써 잠을 청한 뒤에도 아이들의 뒤척임에 쉽게 잠에서 깼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내일 아니 오늘, 그러니까 정확히는 시간과 달력으로 따지면 내일이지만 관례상으로는 오늘, 얼마나 졸릴지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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