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2(수)
아내의 목장 모임이 있어서 (원래 화요일이지만 하루 연기됨) 차를 놓고 출근했는데 목장 모임이 취소됐다고 했다. 차가 있긴 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아무리 차가 있어도 둘을 데리고 어딘가로 나가야 할 때 찾아오는 막연한 부담감 탓에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그러다 늦은 오후, 나의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됐을 무렵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나 사실 맑음 케이크 너무 가고 싶어서 좀 고민했음]
아내는 아침부터 엄청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가 먹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었다. 아내가 맑음케이크 얘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는 건, 그리고 고민이라는 단어를 택했다는 건, 아직 불씨가 타고 있다는 얘기였다. 다만 그때 출발하기에는 이미 나의 퇴근 시간이 많이 임박했고 나와 동선을 교차시키면서까지 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번을 타고 대화역으로 가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좀 전에 200번 탔어"
"여보 그럼 내가 대화역으로 갈까?"
"맑음케이크 가려고?"
"응"
"그래 그럼"
대화역에서 맑음케이크까지 걸어갔고 아내는 그리로 바로 왔다.
"여보는 뭐 마실 거야?"
"아 먹고 가려고?"
"응"
에그타르트 두 개와 블루베리초코 케이크를 소윤이, 시윤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 시윤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를 테면 자기가 들고 먹겠다거나 자르지 않고 통째로 베어 먹겠다거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울며 떼를 쓰는 일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제법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하다가 마땅치가 않아서 일단 차에 탔다. 집에 돌아가면 내가 축구하러 나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바로 독박 육아에 돌입해야 하는 아내는 저녁을 거르더라도 빠른 퇴근을 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저녁은 안 먹고 가여?"
"어. 오늘은 그냥 자자. 소윤이랑 시윤이 점심도 늦게 먹었고, 카페에서도 뭐 많이 먹었으니까"
"엄마.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여"
그래. 시작부터가 이길 수 없는 논쟁(?)이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보다 확실한 이유가 어디 있으랴.
"그래. 그럼 엄마가 김에다 싸서 줄게. 얼른 먹고 자자"
평소에 축구하러 나갈 때는 잠자리에 누워서 인사할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할 일이 아직도 여러 개 남아 있으니 아내에게 애들을 떠넘기고 가는 게 영 편치 않았다. 편치 않았으면 안 나가야 좋은 남편인데 기어코 나가는 나는 나쁜 남편이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여보. 갈 게"
"그래. 여보"
아내한테 9시쯤 자러 들어왔다는 카톡이 와 있었다. 축구가 끝나는 시간인 10시 30분쯤에는 아직도 시윤이가 자지 않고 있으며 화가 나서 10분 전쯤 그냥 방에서 나왔다고 했다.
[겨우 충전한 에너지 다 고갈돼서 펑펑 울었음]
아내가 아까 맑음케이크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얘기했었다.
[아. 나오니까 좀 살 것 같다]
아내는 뭐 엄청난 쾌락을 누린 게 아니라 그냥 조금 더 버틸 힘을 채운 것뿐이었다. 그것마저도 21개월짜리 꼬마에게 박탈당하는 느낌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도대체 강시윤이는 왜 그러는 걸까. 소윤이 때도 그랬었나. 첫째 키울 때는 처음이라 모르고, 둘째 키울 때는 기억 안 나서 모르고. 대체 애를 몇 명이나 키워 봐야 아는 순간이 찾아오는 걸까. 집에 가보니 아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그대의 심령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만한 무언가(먹을 것)를 사 가느냐고 물었지만 아내는 괜찮다며 그냥 오라고 했다. 나였다면 치킨 같은 게 치료약이 됐겠지만 아내는 타고난 게 육식파가 아니라 그냥 과자 두 봉지를 사들고 들어갔다. 씻으러 들어가기 전 다시 한번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진짜 괜찮아? 뭐 치킨이라던..."
"그래 사 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평소에 생활비로 먹을 때는 한 번도 시킨 적 없는 비싼 메뉴를 고르길래 상식선에서 결정하자고 촉구했다. 아내는 육식파도 아니고 치킨도 나 때문에 보조를 맞춰주는 정도지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처럼 치킨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치킨 그 자체보다 남(편)의 돈으로 무언가를 얻어먹는 그 행위 자체가 쾌감을 줬던 것 같다. 박한 용돈에 고물가 시대의 치킨 한 마리는 큰 타격이지만 아주 잠시라도 아내가 현실에서 탈출해 구름 위를 걸을 수 있다면 뭐 그 대가로는 전혀 아깝지 않다.
(여보. 대외용 멘트일 뿐. 카드 이용내역 보면 가슴이 쓰려. 특히 여보가 기분 좋아서 헤헤거릴 때 보면, 그냥 순간이었을 텐데 하면서 가수 김현정의 '멍' 후렴구 첫 가사가 떠오르더라. 그냥 그렇다고. 여보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