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아빠, 가장 그리고 아들

18.12.13(목)

by 어깨아빠

아내가 오전에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늘 받던 애들 사진이 아닌 굉장히 생소한 사진이었다. 무슨 사진인가 싶어 확대해서 봤더니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은, 곰팡이 사진. 아내가 함께 보낸 멘트처럼 그야말로 '맙소사'였다. 베란다와 닿은 거실 구석 한쪽에 자그마하게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리에서는 두 가지 회로가 동시에 가동됐다. 곰팡이로 인한 스트레스 회로, 곰팡이로 인해 스트레스받을 아내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는 스트레스 회로. 내가 분석하기에 아내는 시각 및 후각 노출에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인 것 같다.(이다라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얼룩, 곰팡이, 먼지, 생선 냄새, 돼지 냄새가 아내 곁에 출몰할 경우 아내는 유독 예민해진다. 곰팡이 같은 건 누구라도 달가워하지 않긴 하지만 아내의 거부 반응은 평균 이상이다.


사실 나는 일평생을 곰팡이와 친구로 지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고 (결혼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세균 실험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곰팡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곰팡이보다 더 싫은 게 곰팡이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우울한 기운을 뿜어낼 아내의 반응이었다. (부모교육 첫 번째 시간에 배운 초감정 을 생각하면, 아직 난 한참 훈련이 덜 됐다)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강제로 평상심을 유지시키려는 나의 노력과는 반대로 어떻게든 우울, 부정의 기운을 발산하려는 아내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아내에게 장문의 카톡이 왔다. 나보다 조금 더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갖추고 의무적으로라도 먼저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는 내용이었다. 사과에 진심이 담기면 가장 좋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더라도 화해를 위한 일보 전진을 위해서라면 가끔은 형식적 사과도 매우 유용하다.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기분 좀 나아졌어?"
"어. 나아졌지"
"나아지긴 뭘 나아져. 나도 미안해"

뭐 인과 관계를 다 떠나서 어쨌든 아내에게 짜증 냈다는 사실은 미안해 마땅하니까. 퇴근하고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함께 교회 청년부 임원 했던 형, 누나, 동생을 무려 9년 만에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SNS가 있으니 소식은 접하고 있었지만 모두 함께 모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렘이 있었다. 젊은 날의 기억, 그것도 굉장히 따뜻하고 좋았던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 설렜다. 문제는 하필 아내도 오늘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은 날이었다는 거다. 아내는 자기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거고 나는 매우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 자기는 빠질 테니 날더러는 나가라고 했다. 약속 장소가 신림이라 (내) 엄마에게 SOS를 할까 하고 전화를 해봤지만 엄마도 저녁에 일이 있어서 애들을 맡길 상황은 아니었다.

'애 둘을 일단 데리고 나갔다가 엄마 일 끝나면 넘길까?'
'아내랑 각각 한 명씩 책임지자고 할까?'

아내가 해결책을 마련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기로 했다. 한방에 모든 게 해결됐다.

그리하여 나는 나대로 약속 장소인 신림으로 가고,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친구 맞을 준비를 했다. 아무리 집이라고 해도 애 둘을 봐야 하는 건 여전히 힘든 현실이고 애들을 떼어 놓고 자유로운 만남을 가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소윤이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모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제부터 계속 이모들 얘기를 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어보니 소윤이는 아주 최고조의 기분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아내에게도 크게 어려움이 되지 않았는데 오늘도 요주의 인물은 시윤이었다. 내내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계속 울고 그랬다고 했다. 누가 우리 시윤이를 순둥이라고 했던가. 아내는 '역대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자기가 무슨 칼 루이스, 이승엽, 이동국인 줄 아나. 뭐 매일매일이 레전드고 역대급이고 신기록이야.

시윤아. 이런 건 그렇게 기록 안 세워도 돼.

신림에서 만남을 마치고 잠깐 (부모님) 집에 들렀다. 그래도 코 앞에 왔는데 안 들르고 가기도 뭐하고 해서.

"어머. 늦었는데 뭐하러 왔어"
"그냥"

아내 없이 온 것은 물론이고, 애들 없이 온 건 진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뭔가 어색했다. 내가 내 엄마, 아빠 집에 오는 건데 내 애들이 없으니 뭔가 허전하고 어색한 이 희한한 현실. 한 30분 앉아 있는 동안 엄마가 나한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야. 늦었는데 뭐하러 왔어. 얼른 가"

엄마한테 이렇게 응수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왔는데?"
"왜 저래"

아빠도 옆에 앉아 있었지만 차마 엄마 뒤에 아빠는 붙여지지가 않았다. 농처럼 던졌지만 사실이었고 가려져 있었지만 아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난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친구처럼 살가운 아들이 아닐 뿐이다) 자주 만나지만 아내와 애들과 함께 만나는 거랑은 또 달랐다.


얼마 전에 보증금을 좀 줄인 얘기, 얼마 전에 대출기한이 다 차서 연장한 얘기, 그동안 성실히 빚을 갚았다는 얘기를 엄마, 아빠에게 열심히 늘어놨다. 그냥 칭찬받고 싶었고 잠시나마 남편, 아빠, 가장이 아닌 아들이 되어보고 싶었다.


본디 낯 뜨거운 표현이나 칭찬이 없는 집이라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와 아빠가 주고 받는 옅은 미소를 보며, 카페 좀 그만 가라고 핀잔을 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날 지지하고 있구나'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했다.

더 늦으면 밤길 운전 위험하니 얼른 가라는 엄마의 성화에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엄마, 아빠도 따라서 신발을 신었다.

"뭐하러 나와. 그냥 있지"

라고 말은 했지만 소윤이, 시윤이가 없어도 똑같이 배웅해주는 엄마, 아빠가 감사했다.

진심으로.

"갈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덜렁대지 말고 천천히 가"

자유로를 달리면서 다시 남편 및 아빠, 가장으로 변신했다. 아내는 애들 재우다 함께 잠들었는지 방에 함께 누워 있었다.


아내는 어떤 하루였는지 몰라도, 곰팡이 때문에 별로 좋지 않게 시작한 것에 비하면 따뜻했던 과거의 한 부분인 사람들을 만나 옛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서 좋았고. 죽을 때까지 내 편일 수 밖에 없는 엄마, 아빠를 만나 위로를 얻을 수 있었고. 아무 걱정 없이 엉켜서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니 또 그것대로 흐뭇해서 좋았고.

나에게는 제법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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