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2(수)
어제와 비슷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고, 오전에는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오후가 되어서 밖으로 나가고.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아쉬움보다는 다행스러움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또 주말이라 그런 듯했다.
베란다 창으로 밖을 내다보던 시윤이가 말했다.
“아빠아. 자전거 고치는 트럭이 저기 있어여어”
“진짜? 잠깐 주차하신 거 아니야?”
“아니에여어. 문을 열고 있어여어”
“그래?”
근처 동네를 돌면서 자전거를 수리하시는 아저씨가 우리 아파트에 사신다. 그분의 차가 보인다는 말이었다. 베란다로 걸어가면서도 ‘그냥 잠깐 주차하셨거나 뭐 정리하려고 그러시나 보지’라고 생각했다. 단지 안에서 트럭을 세워 놓고 자전거 수리를 하셨던 적은 없었다. 나도 가서 내려다보니 시윤이의 말대로 정말 단지 안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수리를 하는 듯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시윤이의 자전거를 수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같이 나간다고 해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서윤이가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서윤이를 데리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빠와 언니, 오빠의 대화를 듣고는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 가장 먼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집어 들었다.
“압빠아아아아. 으으. 바아아. 바아아아”
아마도 얼른 신발을 신겨 달라는 말인 듯했다. 데리고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 간절하게 애원하니 그냥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코앞에 잠깐 나갔다 오는 거라 괜찮았다.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앉으라 그러면 앉고 서라 그러면 서고. 혹시나 자기 놓고 나갈까 봐 그러는 건가.
예상대로 튜브에 구멍이 나서 바람이 빠진 거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전거에서 바퀴가 분리되는 것도, 그 안에 그런 튜브가 들어있는 것도 무척 신기해했다. 시윤이는 엄청 좋아하기도 했다.
“아빠아. 사실 어제 자전거 타고 싶어서 공원에 간 건데 못 타서 엄청 아쉬웠어여어. 오늘은 자전거 탈 수 있어서 너무 좋아여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쉬웠나 보다. 별로 아쉬운 티를 안 내서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름대로 꾹 참았던 거다.
오늘도 아내와 ‘어디를 갈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 마음의 갈망은 분명했다. ‘넓은 곳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싶다’였다. 예를 들면 넓은 바닷가나 잔디밭이 있는 곳이면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 집 근처에는 그런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도시인의 현실을 인정하고 안락한 관찰과 휴식은 포기하기로 했다. 집에서 가깝고 종종 가는 작은 공터에 가기로 했다.
어제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에 나왔다. 다른 말로 하면,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에 나왔다. 어제처럼 바람은 시원했지만 태양은 뜨거웠다. 그늘에 앉으면 시원하고 그늘을 벗어나면 약간 더웠다. 놀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어제와는 다르게 모든 공간이 시야에 들어오고, 두발자전거를 따라 뛸 필요도 없었다(소윤이는, 어제도 타고 오늘도 타면 너무 다리가 아플 것 같다면서 오늘은 자전거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 어제보다는 훨씬 덜 힘들었다. ‘덜’ 힘들었다는 말이지 ‘안’ 힘들었다는 건 아니었다. 캐치볼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림보도 하고 뛰어넘기도 하다 보면 당연히 힘들다. 억지는 아니었다. 나도 아내도 웃으면서 즐겁게 같이 놀았지만, 힘들기는 했다. 어제보다는 아니었지만.
바닥에 땅따먹기(혹은 사방 치기, 어떤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들었다)가 그려져 있어서 소윤이가 그걸 하자고 했다. 시윤이는 이리저리 자전거를 타며 돌아다니다가 누나가 하는 걸 구경하러 왔다. 소윤이는 1단계부터 8단계까지 모두 통과하는 걸 일단 목표로 삼았다. 6단계까지 성공하고 두 단계만 남았을 때, 소윤이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모기 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같이 놀래?”
소윤이도 어색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남자아이의 엄마도 같이 있었다. 애들도 어색하고 나도 어색했다. 난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생판 남인 사람과 처음 보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꽤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아무 말 없이 애들만 보는 건 또 그 나름대로 불편한 일이다.
“소윤아, 시윤아. 놀고 있어. 아빠 서윤이한테 잠깐 갔다 올게”
서윤이를 팔았다. 다시 올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 아내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내는 막 잠에서 깬 서윤이를 잘 달래다가 마침 힘들어하고 있었다. 슬쩍 서윤이를 넘겨받고 아내를 아이들이게 보냈다.
“여보. 소윤이랑 시윤이한테 가 봐”
그 뒤로는 난 계속 서윤이를 봤다. 유모차에 태워서 산책도 하고 언니 킥보드에 태워서 돌기도 했다(이게 엄청 힘들다. 허리를 굽혀야 하니 허리도 아프고). 멀리서 보니 역시 아내는 아까 그 남자아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윤이의 요구를 하나하나 들어주는 게 꽤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색함 속에 표류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남자아이와 소윤이, 시윤이는 어느새 많이 친해졌다. 여기저기 옮겨 가며 놀았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르고 슬슬 집에 가야 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10분 있다가 갈 거라고 미리 알려줬다. 10분은 금방 흘렀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내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남자아이도 따라왔다.
“소윤아. 내일도 여기 나와. 나도 나올게”
남자아이가 소윤이에게 자기는 내일도 여기 나올 거라면서 소윤이에게도 나오라고 했다. 소윤이는 아내에게 ‘내일도 여기 또 나오자’고 얘기했지만, 아내는 ‘어떻게 내일 또 나와’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아내에게 물었다.
“왜요? 내일 무슨 일 있어요?”
“아, 그런 건 아닌데”
‘내일은 남편도 없고 나 혼자 얘네 셋을 데리고 나오는 건 너무 힘들지 않겠니’라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윤이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요즘 같은 때에, 한 명의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가. 또 성향도 소윤이랑 잘 맞았던 것 같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서 주변 산책을 좀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차로 가려는데 마침 그 남자아이의 가족도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둘은 또 만났다. 하루 아니 고작 2시간 정도 논 사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애틋했다. 남자아이 가족의 차가 우리 차 바로 옆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에 타서도
“00야. 나중에 또 만나자아아아아”
“형아아아. 나중에 또 만나아아아아”
라고 외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소윤이는 진심으로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소윤아. 내일은 아니어도 언젠가 여기 또 놀러 오면 만날 수도 있지”
“맞아여. 그 친구는 여기 근처에 산다고 했으니까 우리보다는 자주 오겠져?”
“그래. 혹시 또 만나게 되면 그때는 엄마가 친구 엄마 전화번호 물어볼게”
나는 상상만 해도 오그라드는 일을,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잘 한다. 아내의 말은 허세가 아니다. 아마 진짜 그럴 거다. 그렇게 친해진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저녁은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소윤이가 대답했다.
“아빠. 저는 거기 김치부르스에 가서 고기 구워 먹고 싶어여”
아내와 내가 선뜻 ‘그러자’라고 대답하기 어려운 의견이었다. 무엇보다 서윤이가 가장 통제되지 않는 변수였고, 그래서 결정이 어려웠다. 아내와 나는 잠시 각자 생각에 빠졌다. 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꾸 안 좋은 상황이 머리에 그려졌다.
“여보. 어떻게 하지?”
“가자. 가서 먹지 뭐”
“서윤이 괜찮겠지?”
“뭐 안 되면 안고 먹으면 되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서윤이가 유모차에 누워 있기만 할 때 가 보고 두 번째로 가는 거였다. 동네 산책을 할 때마다 아내도 나도 얘기했다.
“아, 우리도 저렇게 앉아서 먹으면 좋겠다”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연휴의 마지막 날)에나 도전해 볼 일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고기를 주문했다. 처음 주문한 고기는 딱 한 점(애들 줄 고기에서 발라낸 오돌뼈까지 포함하면 서너 점)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너무 잘 먹었고, 심지어 서윤이까지 잘 먹었다. 그렇게 잘 먹는 걸 보니 정말 배가 안 고팠다. 나중에 밤이 되면 배고픔이 깊어질지언정 당장은 정말 그저 흐뭇했다.
“여보도 얼른 먹어”
“아니야. 난 오늘 진짜 애들 먹이러 온 거야. 괜찮아”
아내는 기어코 고기를 조금 더 시켰다.
“소윤아, 시윤아. 고기 더 줄까?”
“아니여. 배불러여”
“그래? 알았어”
고기가 다 구워지고 나서 또 물어봤다.
“소윤아, 시윤아. 진짜 괜찮아? 고기 더 안 먹어? 많이 먹어”
“배불러여. 충분해여”
“진짜?”
“네. 아빠 왜 자꾸 물어봐여?”
“아니 너네 충분히 배부르게 먹으라고. 모자라면 더 시켜줄 테니까”
역시나 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이상 편하기는 어렵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서윤이는 아주 얌전하게 협조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연휴 내내 실컷 놀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빠가 이틀만 출근하면 다시 주말이 온다는 걸 알아서 그렇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여행을 너무너무 기다렸다. 신기하다. 아이들도 여행을 기다리는 게.
“아빠. 여행이 너무너무 기대가 돼여”
“아빠아. 이제 아빠 두 번 회사 가고 나면 그때 여행 가는 거져어?”
그래도 오랜만에 자기 전에 알람을 맞추려니 영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