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6(주일)
어제 아내와 아이들이 한 방에서 자고 나는 다른 방에서 혼자 잤다. 방은 넓었는데 이불이 마땅치 않았다. 같은 집이지만 다른 방에서 자는,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아침이 밝자 아이들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렸다. 다행히(?) 아내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서윤이가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바람에 깼다고 했다.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나가서 놀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물총을 하나씩 들고 재미있게 놀았다. 우리 집에서는 서로 쏘는 것도 금지라 그냥 바닥이나 허공을 향해 쏴야 하는데 자기들 나름대로 재미의 요소를 만들어서 놀았다. 서윤이도 언니와 오빠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오늘도 아침은 바깥 평상에 앉아서 먹었다. 은은한 소똥 냄새가 풍겨 오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시골집 같은 숙소는 여러 면에서 색다른 경험을 제공했다. 우선 층간 소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발걸음. 소윤이와 시윤이가 쿵쾅거리며 걸을 때마다 아내와 내가 놀랐다. 몸에 뱄다.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조심시켜야 한다는 것이. 소윤이와 시윤이도 그걸 엄청 좋아했다. 두 번째로 마스크 없이 나가는 외출. 물론 숙소의 마당까지지만 그것만 해도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마스크 없는 삶이 이렇게 좋았던가 싶다. 마지막으로 첫 끼를 바깥바람을 맞으며 먹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하는 것. 집에서도 식사는 항상 감사히 먹지만 바람을 맞으며 먹는 밥은 유독 더 감사를 느끼게 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예배를 드렸다. 혼자 생각하기로는 예배도 평상에 앉아 드릴까 싶었는데, 그러면 서윤이가 너무 돌아다닐 것 같았다. 서윤이 쫓아다니느라 제대로 예배를 못 드릴 것 같아서 생각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내는 어제 늦게 잔 후폭풍이 셌는지 예배 시작할 때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아내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을 앞으로 당기고 아내는 벽에 기대게 했다. 아이들이 가끔씩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여행을 왔으니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너무 번잡스럽고 수고스러워서. 대신 소시지나 감자, 옥수수, 감자, 고구마, 마시멜로 같은 것만 간단히 구워 먹으려고 했는데, 어차피 그걸 구워 먹으려고 해도 숯과 석쇠는 사야 했다.
“여보. 그럼 차라리 고기도 구워 먹을까?”
“그럴까? 그럼?”
대신 양을 엄청 줄였다. 딱 아이들이 배불리 먹기 좋을 정도만 샀다. 모름지기 바베큐는 저녁에 해야 하지만 해가 지면 모기와 각종 날벌레가 들끓을 것 같았다. 조금 더울 게 걱정이었지만 점심에 숯불을 피우기로 했다. 어차피 고기 굽는 건 나만 하면 되니까.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놀았다. 높은 문턱이 익숙하지 않은 서윤이가 한 번씩 넘어지는 것 말고는 갈등이나 슬픔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밖이 좋은지 불록을 평상에 가지고 나와서 놀았다. 난 옆에서 열심히 불을 피웠다. 서윤이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아내가 재운 덕분에 특히 더 평화로웠다. 소시지, 옥수수, 고기를 차례대로 구워줬다. 존재감이 큰 만큼 난 자리도 크다더니, 서윤이의 부재가 가지고 온 한적함과 여유가 새삼 소중했다. 서윤이는 무려 2시간을 잤다.
아내와 나는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았다. 아내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열심히 불 피워서 최상의 굽기 상태로 음식을 제공했고, 아이들이 그걸 아기 새처럼 잘 받아먹으니 아주 뿌듯했다. 그게 식욕을 잠재웠다. 뒤늦게 일어난 서윤이도 언니와 오빠처럼 잘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음식 냄새를 맡고 찾아온 아기 고양이들과 놀고 싶어서 갖은 수를 썼지만, 겁이 많은 세 마리의 아기 고양이는 일정 거리 안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 없을 때 먹으라며 물과 음식(찌꺼기에 가까운)을 놓아두고 들어왔다.
“여보. 삼시세끼를 왜 먹는 것만 찍는지 알겠네. 먹고 치우니까 또 저녁 준비해야겠네”
“그러게”
점심 준비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먹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치우는 것도 좀 걸리고 그러니 정말 곧 저녁이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잠시 거실에 누워 TV를 켰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와 시윤이가 득달같이 다가오더니
“아빠. 왜여? 왜 TV 틀었어여?”
라고 물었다.
“왜긴. 아빠도 좀 누워서 쉬면서 보려고 그러지”
“아빠아아. 아빠가 보면 우리도 보고 싶어진단 말이에여어”
“너네는 어제 봤잖아. 아빠 보고 싶은 거 볼 거야”
“아이, 아빠아. 그런 게 어딨어여어”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 TV는 미끼였다. 잠시 TV를 틀어 주고 나도 쉴 생각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좋아하는 ‘페파피그’를 틀어 주고 나도 잠시 옆에 누웠다. 서윤이만큼 어린아이들이 삭당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걸 보면, 사실 안타까운 마음도 크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아마 처음 시작은 ‘밥이라도 좀 편하게 먹자’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그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는 게 보통 쉽지 않을 거고. 아니,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 거고. 그래서 TV를 놓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 맛을 잘 알고 잘 빠질 거라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애초부터 TV는 없었다. TV가 있었다면 주말마다 잠깐 쉰다는 핑계로 수시로 TV를 틀어줬을 거다. 그럼 소윤이, 시윤이와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게 아닌 시간이 엄청 늘어났을 테고. 오늘은 여행이니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보너스, 나에게도 보너스.
저녁은 나가서 사 먹었다.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돌아가며 기도를 했는데, 누가 하든 ‘여행의 소중함’을 감사로 느끼고 있어서 좋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내도, 나도. 흘러가는 여행의 시간이 아쉬우면서도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같은 마음으로 느꼈다. 저녁 먹으러 가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조금 더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소윤아, 시윤아. 가족 여행 시간이 왜 소중하냐면 너네가 나중에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이 가족 여행을 떠올리면서 힘을 낼 수 있어”
“왜 가족 여행을 생각해야 힘이 나여어?”
“힘들고 속상하고 지칠 때마다 가족들하고 보낸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 힘이 나. 엄마랑 아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나랑 동생이랑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그런 거 생각하면”
그러고 보니 시윤이에게는 어제 둘이 커피 사러 가면서 따로 얘기도 했었다.
“아마 시윤이는 나중에 이 여행이 기억이 안 날 거야”
“왜여어?”
“음 보통 일곱 살, 여덟 살 때의 기억부터 남거든. 아마 시윤이의 다섯 살 때 여행은 나중에 기억이 안 날걸? 기억은 안 나지만 시윤이 마음속에는 다 남을 거야. 가족이랑 보낸 시간들이”
사실 그 누구보다 아내와 나에게 필요한, 소중한 순간이고 기억이다.
“여보. 시간이 참 순식간에 지나가네”
“그러게. 벌써 내일이 끝이라니”
오늘도 아이들을 재우고 드라마를 봤다. 집에서도 보는 드라마를 여행에 와서도 보는 게 식상해서 영화를 좀 볼까 했는데, 역시나 마땅한 게 없었다. 아내와 소소한 수다는 평소에도 많이 떨고, 또 오히려 편안하고 익숙한 집에서 웃고 떠드는 게 재밌는 것도 있다. 여행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의 밤은, 출근 걱정 없이 늦게까지 드라마 보고 영화 볼 수 있는 정도의 의미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