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5(토)
오랜만의 가족 여행이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멀리 가지 않고, 수도권 인근에서 은둔형(?)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여행과 숙소를 결정하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말했을 때 엄청 좋아했다. 당일인 오늘이 될 때까지 수도 없이 묻고 확인하고 표현했다. 여행이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설레는지.
멀지 않은, 그러나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 장소를 잡았다. 뭔가 멋진 걸 보거나 맛난 걸 먹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 어색함이 주는 긴장과 설렘을 느끼기 위한 여행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중요하게 고려한 게 적당한 거리였다. 아, 가격이었나.
아무튼 여러 가지를 고려해 우리가 잡은 숙소는 한옥, 아니 한옥이라는 이름도 고급스러운 옛날 시골집을 개조한 일반 가정집 같은 곳이었다. 주변의 풍경만 보자면 집에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 법한 곳이었다. 바로 옆에는 소 축사가 있어서 소 똥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정갈하게 정리된 논이 사방에 보이고, 작위적으로 군락을 이루지 않고 제멋대로 들꽃처럼 핀 코스모스가 즐비한 그런 곳이었다.
한 번도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처음 숙소를 마주하고 살짝 당황하기도 했다. 겉모습이 그랬다. 너무 파묻혀 있는, 버려진 집 같은 느낌이었다. 다행히 내부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신선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일부러 고른 숙소였는데,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만 유경험자였다. 어렸을 때 할머니 집이 딱 이랬다고 했다.
숙소로 오면서 점심을 먹었다. 시윤이가 수제비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어제 아내와 미리 찾아 놓은 곳이었다. 도토리묵 요리와 도토리 반죽 수제비를 파는 곳이었다. 도토리 전을 시켰는데 반죽에 잘게 썬 청양고추가 들어가 있었다. 최대한 청양고추가 없는 부분만 떼어서 줬는데, 소윤이도 시윤이도 맵다면서 혀를 내밀고 부채질을 했다. 사실 서윤이가 제일 먼저 먹었다. 항상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난리를 치니까 부랴부랴 떼어서 주고 보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맵다고 그랬다. 서윤이는 뭘 모르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다가 결국 맛을 느꼈는지,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반응을 보이며 먹던 걸 뱉었다. 아내와 나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쉽게 접하기 힘든 맛이었다.
들깨 도토리수제비가 있으니 애들은 그걸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후춧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도토리 전만큼 매운 건 아니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가 계속 떠먹기에는 다소 버거웠나 보다. 그것도 아내와 나만 잘 먹었다. 애들도 먹기는 했는데 배를 채워야 하니 억지로 매운 걸 참아가며 먹는 모습이었다. 조금 미안했다. 정말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 고른 식당이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정말 시골이었다. 밥 먹고 들른 카페는 성수동, 한남동 이런 곳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맛도 훌륭했다. 작은 정원이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있기에도 좋았다. 심지어 화장실도 깨끗하고 향기가 좋았다. 다만 사람이 없었다.
“여보. 사람이 없어서 깨끗한 거 아니야?”
라는 아내의 농담이 꼭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가족이 다시 들르는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과연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지 걱정이었다. 카페 자체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맛도 분위기도. 유일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서윤이였다. 똥 싸고 칭얼거리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변덕 부리고. 아내와 나의 평정심을 흔들 만큼은 아니었다.
숙소에는 블록이 조금 있었다. 우리 집에 있는 딱 그 정도 양(아주 적은)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작은 블록에도 커다란 선물을 만난 듯 기뻐했다. 두 녀석 모두 참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아는 지인은 초등학생인 두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장난감이 없어서 지루하다’, ‘여긴 너무 심심하다’라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통에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직 어려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내와 나의 감성과 비슷하게 자라고 있어서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직 조미료 무첨가 건강식 밥상 같은 담백한 여행에도 즐거워한다.
저녁에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소윤이가 소시지 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걸 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장을 보러 가게 됐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블록을 가지고 노느라 같이 마트에 가는 것도 마다했다. 서윤이만 데리고 나왔다. 서윤이를 아기띠로 안고 장을 보는데 얼마나 애교를 부리면서 웃음을 날리는지. 장 보기는 명분이었고 서윤이랑 데이트하고 온 기분이었다. 얼른 말을 하면 좋겠다. 그럼 더 재밌을 거 같다. 빨리 크면 좋겠는데 느리게 크면 좋겠다. 이 해석불가한 감정은 소윤이 때도, 시윤이 때도 느꼈지만 그때는 주변의 간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의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크는 게 진심으로 아쉬우면서도 빨리 커서 더 많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이 섞인 거다.
아내가 소시지 볶음밥을 만들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커피가 당겼다. 집에서 드립백을 가지고 온다는 걸 깜빡했다. 커피를 사러 갔다 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다녀오기로 했다. 이번에는 시윤이만 데리고 나왔다. 소윤이는 안 가겠다고 했다.
“아빠아. 저는 아빠가 운전할 때 이렇게 칸에 딱 맞춰서 가는 게 너무 신기해여어. 저는 나중에 이렇게 운전을 못 할 거 같아여어. 운전하다가 옆으로 떨어질 거 같아여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시골길을 지나가는 게 신기했나 보다. 시윤이는 쉬지 않고 질문과 감탄을 섞어가며 얘기했다.
온라인 모임을 마치고 바로 아이들을 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침대에서 재우고 아내와 서윤이가 바닥에 누웠다. 방 문(창호지를 바른, 진짜 옛날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왔다. 모기향을 피우고 평상 모서리 세 곳에 놨다. 평상에 한참 누워 있었다. 아내가 나올 때까지. 시골집에 살아 본 적도 놀러 가 본 적도 없어서 옛 추억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다. 혹시나 별이 보일까 기대했는데 별은 보이지 않았다. 소 똥 냄새도 밤이 되니 전혀 나지 않았다.
시골집이라고 애들이 더 빨리 잠들고 그러지는 않았다. 아내는 집에서처럼 한참 있다가 나왔다. 그래도 꽤 이른 시간이었다.
“여보. 여기 너무 마음에 든다. 너무 좋다. 그치?”
“맞아. 진짜 너무 좋네”
남은 밤은 아내와 소소하게 드라마를 보며 보냈다. 중간에 서윤이가 깨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다. 신기했다. 그 어둠 속에서 어디가 문인지 어떻게 알고. 평소라면 아내가 다시 나오지 못할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주는 힘을 빌려 기어코 다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