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9(수)
아내가 낮에 어느 카페의 크루아상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너무 먹고싶네”
“집에 갈 때 사다 줘?”
“근데 시간 낭비가 클 거 같아”
크루아상의 즐거움을 위해 남편의 퇴근 지연을 감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고, 아내는 남편의 빠른 퇴근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면 여보 오늘 밤에 나갔다 와”
아내에게 오랜만에 밤 외출을 제안했지만 답이 없었다. 두 시간쯤 지나고 나서 답장이 왔다. 두통이 엄청 심하다고 했다.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해 봤는데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내의 두통은 잊을만하면, 아니 잊기도 전에 찾아오는 잦은 증상이다. 다만 강도는 그때그때 다른데 오늘은 최고 강도인 듯, 아내의 목소리가 정말 많이 아픈 사람 같았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전화를 하며 아내의 상태를 살폈는데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진 느낌은 아니었다.
“여보. 저녁은 어떻게 할 거야?”
“나가서 먹든지 사서 집에서 먹든지 해야 할 거 같아”
“여보는? 여보는 밥 먹고 싶은 생각 있어?”
“아니. 난 안 먹어도 괜찮을 거 같아”
“그래? 그럼 내가 퇴근해서 애들 데리고 나갈게”
“여보 혼자? 너무 힘들지 않을까?”
“그래도. 여보 조금이라도 좀 쉬어야지”
아내는 거의 쓰러져 지내는 듯했다. 퇴근해서 만난 아내의 얼굴은, 역시나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 같았다. 두통 말고는 다른 증상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내에게는 익숙한 증상이었다. 며칠 전에 목이 뻐근하다고 했는데 아마 그런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집안일과 육아로 인해 여기저기 뭉치고 굳은 근육이 혈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거라고 추정해 본다. 아무튼 아내는 거의 중환자처럼 기운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만 풀고 바로 서윤이 밥을 준비했다. 냉동실에 있는 밥을 데우고 계란프라이를 했다. 계란은 두 개. 밀폐용기에 서윤이 밥을 담고, 숟가락을 챙기고, 턱받이도 챙기고, 물티슈도 챙겼다. 그 사이 소윤이와 시윤이는 옷을 갈아입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밤에 아빠와 나가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했다.
“여보. 잘 갔다 와”
“어, 좀 쉬고 있어”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쌀국수와 짜장떡볶이 중에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면서도 서윤이를 데리고 가기에 적당한 곳을 추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짜장떡볶이를 골랐다. 다행히 서윤이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다만 떡볶이 가게에 아기의자가 없고, 부스터도 챙기지 않았다는 게 나의 가장 큰 위험 요소였다.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이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도 유모차에서 꺼내 달라며 벨트를 잡고 낑낑거렸다.
“서윤아. 여기는 아기의자가 없어서 서윤이가 유모차에 앉아서 먹어야 돼”
서윤이가 이 긴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제발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박또박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싸 간 밥을 꺼내는 걸 보여줬다. 일부러 굉장히 느리게. 느긋하게 밥도 꺼내고 숟가락도 꺼내고 턱받이도 꺼내고.
‘자, 서윤이 밥 주려고 아빠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네? 보이지?’
라는 심정으로. 다행히 서윤이는 너그러이 기다렸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벨트를 부여잡으며 꺼내 달라고 했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인생이 불쌍해서 봐 주는 건지 끝까지 풀어 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서 다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떡볶이와 순대를 시켜서 같이 먹었다.
소윤이는 자기 몫으로 할당된 떡볶이를 엄청 금방 다 먹었다. 그러더니 더 먹고 싶다고 했다. 짜장떡볶이를 하나 더 시키기에는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순대를 조금 더 먹는 건 어떠냐고 권했다. 소윤이는 순대를 더 먹긴 했지만 엄청 좋아서 먹는 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시윤이는 순대도 잘 먹어서 소윤이보다는 배가 더 많이 찼을 거다. 다행히 서윤이도 끝까지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다 먹고 나와서는 빵집에 들렀다. 아내가 낮에 먹고 싶다던 아몬드 크루아상 하나와 플레인 스콘 하나, 그리고 아이들에게 줄 라우겐 스콘을 샀다. 한살림에 들러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마실 주스도 하나씩 고르게 했다. 상가 앞 광장에 잠시 앉아 스콘과 주스를 먹게 했다. 배가 덜 찬 소윤이를 위한, 조금이라도 더 혼자 있어야 할 아내를 위한 나름의 대책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앉아서 빵 먹는 걸 보면 가만히 있을 리 없는 서윤이를 위해, 스콘을 조금씩 떼서 입에 넣어 줬다. 서윤이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빵을 받아먹으면서 나와 장난을 많이 쳤다.
시계를 보니 고작해야 한 시간 조금 넘는 외출이었다. 아내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면 좋으련만 애들도 재워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땅히 갈 데도 없었다. 다시 만난 아내의 얼굴은, 아까보다 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바로 아이들을 씻기고 재울 준비를 했다. 서윤이를 씻기면서 거실에 있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말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아빠랑 자자”
“네에”
애들 재울 준비를 마친 뒤에는 아이스라떼 한 잔을 타서 사 온 빵과 함께 식탁에 뒀다.
“여보. 우리 들어가면 이거라도 먹어”
씻을 때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고 장난치던 서윤이가 갑자기 졸려졌는지 활력을 잃었다. 아내가 서윤이를 안아준다고 했는데 그걸 마다하더니 나에게 와서 안겼다.
“여보. 뭐야?”
“그러게? 뭐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아니, 이런 일이 있었나 싶다. 서윤이가 엄마 품을 거부하고 나에게 와서 안기다니. 그것도 졸려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 순간에. 은근히 흐뭇했다.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니 언니나 오빠처럼 아빠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구나’
셋 다 졸렸다. 덕분에 재우러 들어가서는 큰 어려움 없이 잠깐 누워서 쉰다는 생각으로 있다가 나왔다. 아내는 아주 조금 나아진 듯했다. 아주 미세하게. 아내 말로는 낮에는 훨씬 심했다고 했다. 아내를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자게 했다. 아내는 내가 강력하게 자라고 떠밀지 않으면 평소처럼 이것저것 하다가 늦게 잘 게 뻔했다. 아플 때는 아픈 사람답게 좀 일찍 자고 해야 하는데, 아내 스스로는 그렇게 잘 못한다. 들어가서 휴대폰 하지 말고 자라는 당부와 함께 아내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아내가 들어가고 나서는 편의점에 가서 아내가 부탁한 택배를 찾아왔다. 집에 와서는 아주 조금 쌓인 설거지도 했다. 내일 아침에 안칠 쌀도 씻어 놨다. 애들이랑 나가서 저녁 먹은 건 나에게도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시원한 밤바람은 언제나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래도 피곤하고 힘들긴 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옷을 갈아입고 샤워도 했다.
아내가 아프니 당연한 일을 한 거지만, 그래도 오늘은 칭찬받아도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