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과 축구의 여파

21.10.17(주일)

by 어깨아빠

서윤이는 오늘도 가장 먼저 일어나서 사이렌을 울렸다. 진짜 꼭 싸이렌 같다.


“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바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깊이 잠들지도 못했다. 어제의 선례(는 수두룩하지만)가 있어서 그랬는지 오늘은 체념하고 아예 좀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교회 갈 준비하는 게 여유로웠다.


불과 며칠 전까지 화창한 가을 날씨였는데 갑자기 한파 주의보가 찾아왔다. 급히 따뜻한 겨울옷과 두꺼운 겉옷도 챙겨 입혔다. 육아인에게 겨울의 단점이라면 외출 준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옷 챙기는 것도 입히는 것도 여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여유로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새싹꿈나무 예배에 보내고 서윤이와 함께 예배당에 자리를 잡았다. 서윤이는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 보통 자리를 잡으면 바로 내려온다고 하거나 안아 달라고 하는데 오늘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오늘은 왜 내려 달라고 안 하지?’라고 생각하며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기도하느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서윤이가 자고 있었다. 빨던 손가락도 빠진 채로, 아주 깊이. 갓난 아기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만큼 어렸을 때를 빼면, 유모차에 앉아서 혼자 잠든 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어제부터, 오늘 점심 먹을 장소를 미리 정해 놨다. 주일에 자주 가는 칼국수 집에 가자고 했다. ‘슬기로운 산촌 생활’(맞나?)을 봤는데 거기서 수제비를 해 먹었다고 했다. 그걸 보니 수제비가 엄청 먹고 싶었고, 비록 수제비는 없지만 같은 밀가루 종류인 칼국수를 먹기로 한 거다. 아내는 미리 뭘 먹을지 정하면 먹으러 갈 때까지 엄청 설레면서 행복해한다. 어제도 자기 전에 ‘내일 맛있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안타깝게도 아내의 설렘과 기대는 외면당했다.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진 가게의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늦은 여름휴가를 갑니다’


아내의 또 다른 특징은, 먹기로 한 걸 여러 이유로 못 먹게 됐을 때 급격히 혼란스러워한다. 대안으로 뭘 먹을지, 어디를 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어떡하지’를 연발한다. 오늘은 의외로 빠르게 대안을 선택했다.


“여보. 그냥 거기 가자. 나 지금 너무 배고파서 더 이상 고민을 못하겠어”


바로 근처에 있는 다른 칼국수 가게로 갔다. 1층에 사람이 가득해서 2층에 앉았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아주 편하게, 부담 없이 식사를 했다. 서윤이는 밥을 잘 안 먹었다. 뭔가 입에 안 맞았던 건지 아니면 배가 안 고팠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안 먹었다. 서윤이가 밥을 시원찮게 먹는 건 굉장히 어색한 모습이다.


점심 먹고 나서는 바로 아울렛으로 향했다. 아내의 생일 선물도 사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신발 크기도 좀 재 보려고 했다.


“여보. 일단 여보 옷부터 고르자.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봐야 돼”


아이 셋과 함께 복잡한 아울렛에서 쇼핑을 하면, 그냥 집에서 하루를 보낼 때보다 2-3배는 빠르게 체력이 소진된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많이 남아 있을 때 가장 중요한 쇼핑을 마쳐야 한다. 오늘의 가장 크고 주된 목적은 아내의 옷을 사는 것이었으니까, 일단 아내 옷부터 구경했다. 아내와 나는 옷 고를 때도 궁합이 잘 맞는다. 아내가 이것저것 고민을 많이 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난 과감하게 아내의 후보군 중에 하나를 골라 준다. 오늘도 그랬다.


아내 옷을 사고 나니 시윤이 옷이 눈에 밟혔다. 마땅히 입을 두꺼운 겨울 외투가 없는 시윤이에게 옷을 하나 사 주고 싶었다. 소윤이는 철마다 해마다 새 옷도 사고 새 옷처럼 깨끗하고 좋은 옷을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시윤이는 항상, 헌 옷이 된 누나의 새 옷이나 누군가 물려준 옷을 입었다. 소윤이가 입던 옷이 여전히 깨끗하고 새 옷 같으니 물려 입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 옷을 입힐 기회가 없었다.


“엄마아. 사기로 했어여? 안 사기로 했져?”


시윤이의 질문에 시윤이의 인생(?)이 녹아 있었다. 계획에 없던 시윤이 옷을 사기로 했다.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봤는데 가격표에 붙어 있던 가격에서 조금 더 할인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마치 큰돈을 번 사람처럼 좋아했다.


“사길 잘했네”


소윤이는 조금 서운해했다. 그야말로 조금.


“소윤이는 조금 서운해? 소윤이 것만 안 사서?”

“조금?”


내가 물어봤더니 웃으며 솔직한 마음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서운함이었다. 소윤이도 다 안다. 그동안 자기가 누린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그러니까 소윤이도 웃으며 표현하는 거고. 그래도 위로(?)해 줬다.


시윤이 옷까지 사고 나니 체력이 훅훅 떨어졌다. 역시 아내 옷부터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조금 더 구경을 하긴 했는데 정신도 없고 힘도 들어서 집중이 안 됐다. 별호 한 것도 없고 본 것도 없는데 시간이 훌쩍 흘렀다.


장모님이 해 놓으신 반찬을 가지러 잠시 처가에 들러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미리 얘기해 뒀다. 오늘의 만남은 오랜 시간 함께 하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라 잠깐 반찬만 가지러 가는 거니까 ‘이제 그만 가자’라고 해도 떼를 쓰거나 울지 말라고. 가능하다면 시원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자고. 물론 대답과 다짐은 늘 잘 한다.


정말 잠깐 머물렀다. 한 시간 정도. 앉아서 과일 먹고 반찬 챙기고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하나도 못 놀았다’면서 아쉬워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앉아서 과일 먹고 이야기하는 건 노는 게 아닌가 보다.


“아빠. 그래도 5분이나 10분은 있다가 올 거져?”


라며 소박한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던 시윤이는(소윤이는 그런 시윤이이게 5분이나 1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니 굳이 엄마, 아빠에게 시간을 제안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시윤이의 섣부른 언행을 자제시켰다) 한 시간으로는 턱도 없다는 듯 연신 아쉬움을 표현했다.


원래 집에 와서 애들은 삼겹살, 아내와 나는 수육을 해서 먹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게다가 아내와 나의 피로감도 예상보다 훨씬 짙었다.


“여보. 그냥 엄마가 싸 주신 걸로 먹이자. 우리도”

“그래 그러자”


일단 아이들만 먼저 먹이기로 했다.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에 나물이 많아서 비빔밥을 만들어 줬다. 따로 반찬을 차려 주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애들이 먹기에도 덜 번거롭고. 서윤이는 저녁에도 밥을 잘 안 먹었다. 방귀를 부룩부룩 끼고 설사도 하는 게 속이 불편한가 싶었다. 아무튼 생소한 모습이었다. 서윤이가 밥을 연속으로 잘 안 먹는 건.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간 동안 나는 아내와 내가 먹을 저녁을 차렸다. 장모님이 해 주신 반찬의 가짓수가 엄청 많았다. 하나하나 다 꺼내고 참치도 꺼내고 김도 꺼내고 스팸도 구웠다. 그냥 제대로 집밥처럼, 백반처럼 먹고 싶었다. 밥은 햇반이었다(애들도 햇반이었다). 아내와 나는 무척 만족했다. 아내는 나이가 들수록 반찬을 챙겨 주시는 부모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커진다고 했다. 여전히 살림은 아내의 주관 영역이라 나는 아내만큼 실감하지 못하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 것 같다. 냉장고에 가득 찬 반찬통(그것도 양질의)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든든함 만큼 감사함도 클 거다.


배가 부르니 더 피곤했다. 왜 이렇게 피곤한가 생각해 봤더니 오늘 많이 걸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어제 축구의 여파가 오늘까지 이어지는 게 큰 원인이었다. 너무 피곤하고 여파가 크니 다음에는 쉬거나 살살 뛰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 빨리 끌어올려서 안 힘들게 만들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다음 축구의 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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