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6(토)
서윤이가 더 아파지거나 열이 오르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좀 아파서 그런가’ 싶은, 모르고 보면 아픈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칭얼거렸다. 평소에 비해 엄마를 많이 찾기는 했지만(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다) 잘 놀 때는 웃기도 잘 웃고 기분도 괜찮았다.
오전에는 거실에 커튼을 달았다. 원래 있던 커튼이 떨어진 게 여름이 오기도 전이었으니 미루기도 참 많이 미뤘다. 아내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었는데 잠시라도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서윤이 때문에 애를 좀 먹었다. 커튼 다느라고 책장 위에 있던 자석 블록 상자를 내려놨는데 아이들이 그걸 꺼내서 놀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그거 하면서 놀았다.
누워서 애들 노는 거 구경하다가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수술실에서 막 깨어난 환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 장면처럼 아이들 모습이 흐릿하게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중간에 아내가 서윤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가는 것도 봤다. 한 20-30분 자다 정신을 차렸다. 아내는 여전히 안 보였다. 아내도 나처럼 피곤했나 보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고 (정확히 말하면 점심시간이 좀 지났고) 간단히 먹이기로 했다. 과일과 김밥(김과 밥)로 허기만 채우기로 했다. 서윤이는 계속 비슷한 상태였다. 밥은 잘 먹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윤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기가 좀 조심스러워서 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만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나가서 세차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올 생각이었다. 언니와 오빠가 나가고 혼자 남은 서윤이가 과연 괜찮을지 걱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윤이가 아니라 아내가 걱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자, 그럼 우리 각자 한두 개씩 하고 싶은 걸 말해 볼까? 다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일단”
먼저 소윤이가 얘기했다.
“저는 집에서 찰흙을 하거나 슬라임을 하고 싶어여”
“그래? 안 나가도 돼?”
“네. 찰흙이나 슬라임을 하면 안 나가도 상관 없어여”
그다음은 시윤이.
“저는 집에서 찰흙을 하거나 공원에 가서 자전거 타고 싶어여. 근데 안 나가고 찰흙을 해도 상관은 없어여”
그다음은 나.
“나는 우리 모두 다 같이 낮잠 한숨 자는 거”
장난이었다. 진심이었지만 장난이었다. 복권 당첨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랄까.
그다음은 아내.
“엄마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자,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다 같이 나가서 차를 타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사고 잠깐 장도 보고, 집에 와서 너희는 찰흙을 하는 거야. 어때?”
“좋아여. 좋아여”
장을 보면서 손질된 닭도 샀다. 아내가 저녁에 찜닭을 만들어 먹자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식탁에 앉아 찰흙을 했다. 서윤이의 손을 피하기 위해 굳이 식탁에 앉았다. 손이 안 닿아서 오히려 더 짜증을 내는 거 아닐까 싶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서윤이도 아기 의자에 앉혀 놓고 요리 놀이하는 장난감을 줬더니 잘 가지고 놀았다.
그 사이 난 찜닭을 만들었고 아내는 식탁 밑, 아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곳에 숨어 휘낭시에를 먹었다.
“엄마. 거기서 뭐해여?”
“엄마? 커피 마셔”
“왜 거기 앉아서 마셔여?”
“아, 아빠랑 뭐 얘기할 것도 좀 있고 해서”
나중에 아내가 이실직고(?)를 하기는 했다.
찜닭이라고 만들었는데 간장을 너무 조금 넣었더니 (애들이 먹을 거라 적게 넣은 것도 있지만, 사실 간장은 언제나 과감하기 힘든 양념 중에 하나다) 마치 야채 많이 넣고 끓인 삼계탕 같았다. 아내는 이렇게 표현했다.
“삼계탕 같은 스튜?”
정확한 표현이었다. 아내는
“내가 생각한 건 간장 맛이 나는 찜닭이었지만 이것도 엄청 맛있어”
라고 표현했다. 아내는 의외로 음식에 있어서는 표현이 뚜렷한 사람이다. 아내의 ‘맛있다’는 표현은 진심이었을 거다. 실제로 맛있었다. 다만 ‘간장 찜닭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긴 하다’ 정도의 마음도 숨긴 듯했다. 여보, 다음에는 자극적인 찜닭으로 대령할게.
소윤이와 시윤이는 너무 맛있다는 찬사와 함께 열심히 먹었다. 아주 뿌듯했다. 서윤이는 굳이 자기가 먹겠다면서 숟가락을 내어 주지 않았는데, 정작 잘 먹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밥알만 흩뿌려 놓고. 시윤이는 잘 먹다가 갑자기 졸리다면서 힘들어했다. 숟가락 질하는 걸 버거워할 정도로 졸리다고 했다.
“시윤아. 몸이 좀 힘들거나 아픈 건 아니야?”
“네, 그런 건 아니에여. 그냥 졸려서 그런 거에여”
“그래?”
열을 재 봤는데 아주 약간의 미열이 있긴 했다. 어찌 보면 정상 체온이라고 봐도 무방한 온도라 애매하긴 했다. 저녁에 아이들도 함께하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는데 시윤이는 먼저 재우려고 했다. 일단 잠이라도 충분히 재우는 게 나아 보였다. 시윤이한테도 미리 말해줬다. 다 씻기고 나서 데리고 들어가기 전에 시윤이에게 한 번 더 물어봤다.
“시윤아. 아빠랑 들어가서 잘까?”
“아니여”
“그래? 시윤이도 모임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을 거 같아여”
“힘들거나 너무 졸리면 그냥 자도 돼”
“괜찮아여”
내가 보기에도 밥 먹을 때보다는 좀 나아 보였다. 애들한테 밥 먹는 시간은 생각보다 졸린 시간인가 보다.
시윤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화면 밖에 앉게 됐는데 너무 졸렸다(강의를 듣는 온라인 모임이었다). 소파 옆에 앉아서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기대고 듣다가 나도 모르게 코까지 골았다. 그 뒤로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나마 오늘은 강의가 좀 짧았다. 너무 좋았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굉장히 잔잔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난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했지’
라고 의아해하다가 원인을 깨달았다. 육아 퇴근과 동시에 피로는 숨는다. 대신 주말용 환각 체력이 샘솟는다. 그걸로 아내와 엄청 늦은 시간까지 놀았다.
‘그러네. 이러니까 피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