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을 이긴 밤 산책의 기쁨

21.11.08(월)

by 어깨아빠

오전에는 괜찮았는데 오후에는 아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오후에 들어서고 시간이 갈수록 아내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돈까스를 샀다. 애들은 돈까스를 먹고, 난 어제 아내가 산 편육을 먹었다.


퇴근하면서 소윤이와 통화를 했는데, 소윤이가 나에게 집에 거의 다 도착하면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내 차를 베란다에서 보면서 통화하는 게 재밌나 보다. 올라가서 현관문을 열고 만날 때까지 끊지 않고 통화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소윤이의 목소리에서 묘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아빠. 근데 혹시 우리 저녁 먹고 밤 산책해도 돼여?”

“밤 산책? 비 올 텐데”

“지금 비 와여?”

“글쎄. 모르겠네”

“아빠 올 때 비 안 왔어여?”

“안 온 거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왔는지, 비가 오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빠가 생각 좀 해 볼게. 상황 좀 보고”

“그래여. 알았어여”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허락했다. 소윤이의 목소리와 태도가 뭔가 차마 거절을 내밀지 못하도록, 정중하면서도 발랄했다. 다만 아내와 서윤이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즉답을 유보했다.


저녁을 다 먹고 비가 오는지 확인을 하려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차긴 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아빠. 비 와여?”

“아니, 비 안 오네? 나가자 그럼”

“오예”


아내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거절해도 된다고 했다. ‘월요일인데 너무 피곤하지 않느냐, 나갔다 오면 많이 늦어질 텐데 괜찮냐’는 말의 축약이었다. 소윤이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이미 내 마음이 허물어졌다.


부지런히 준비를 하는데 서윤이가 옷을 안 입겠다면서 떼를 썼다. 요즘 아주


“시여”


가 입에 붙었다. 무슨 말을 해도 ‘시여, 시여’하며 떼를 쓸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 인간은 가르침 없이 자랄 수 없는 동물이란 말인가’


언젠가, 곧, 저 녀석에게도 엄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 아직은 미루고 있으니 되지도 않는 공갈포(그래, 그럼 서윤이 혼자 집에 있어 따위와 같은)를 버무려서 겨우 옷을 입혔다.


아내의 두통은 매우 심했다. 퇴근했을 때는 바닥을 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아내는 저녁도 안 먹었다. 아내는 집에서 좀 쉬라고 하고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 오려고 했다. 나간 김에 아내가 먹을 빵도 좀 사 오려고 했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챙기는데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도 같이 나갈까?”

“그럴래? 여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쉬고 싶으면 쉬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바람도 좀 쐴 겸”

“그래, 그럼”

“알았어. 그럼 나 재활용 버리는 데로 갈게”

“그래”


아이들과 먼저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소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아빠 생각에는 엄마가 왠지 빵을 사러 나오시는 거 같아”

“그래여?”

“응. 우리 이따가 엄마가 빵 사러 가자고 하시는지 아닌지 한 번 보자. 아빠는 엄마가 무조건 그 얘기를 하실 거 같아”

“아빠 저도 그래여 저도”

“알았어. 내색하지 말고 모르는 척하고 한 번 보자”


살에 닿는 바람이 무척 차가웠다. 비가 오더니 겨울이 부쩍 가까워진 듯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겨울 겉옷을 입혀서 춥지는 않았을 거다. 서윤이도 두툼하게 입히기는 했는데 손을 빠느라 손이 차가웠다.


“여보. 우리 나온 김에 원동에 좀 들를까?”


소윤이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막 웃었다.


“소윤아. 거 봐. 아빠가 뭐랬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아내는 빵도 사고 커피도 샀다.


유모차에 잘 앉아 있던 서윤이는 돌아올 때쯤에는 내려 달라고 소리를 냈다. 잠깐 안고 있다가 바닥에 내려놨는데 쫄래쫄래 잘 걸어 다녔다. 분명히 피곤했다. 저녁 먹을 때 소윤이가 날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아빠. 기분이 안 좋아여?”

“아니. 왜?”

“근데 왜 이렇게 무표정이에여? 힘들어여?”

“아니야. 괜찮아”


얼굴에 다 드러날 정도로 피곤했나 본데, 아이들과 찬 바람을 맞으며 걷는 순간만큼은 피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좋았다. 소윤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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