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2(월)
어떤 것에도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아침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각만큼 고요한 아침은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일찍 일어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놀았고 서윤이는 아내의 배 위에 올라타서 뛰며 울고 짜증을 냈다. ‘내가 일어났으니 엄마도 얼른 일어나라’는 강력한 표현이랄까.
오늘도 특별한 계획이 있지는 않았다. 어제 아이들에게 얘기했던 박물관에 들렀다가 시장 구경이나 할까 싶었다. 아침 먹고 느긋하게 쉬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양양은 겨울에는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도시다. 특히 우리가 있었던 하조대는 완전한 서핑의 동네라 더 고요했다. 더군다나 평일이었고. 근처에 문을 연 카페 한 곳이 검색되길래 일단 거기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라 차를 타고 가도 됐지만, 산책도 할 겸 걷기로 했다.
어제까지는 가을의 끝자락 같은 날씨였는데 오늘은 겨울의 한복판인 것 같은 날씨로 바뀌었다. 바람이 엄청 세차게 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옷을 한층 더 두껍게 입혔다. 유모차에 방풍 커버도 씌웠다. 오늘의 산책길은 정말 별 게 없었다. 바닷가 옆길을 걷는 게 다였다. 그래도 그 별 거 없는 산책길을, 우리 동네에서는 누리지 못한다. 그게 여행의 가장 큰 의미지 뭐.
한 10여 분 걸어갔는데 카페의 문이 닫혀 있었다. 검색 정보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올 때와 다른 길로 돌아갔다. 소윤이는 길에 떨어진 낙엽을 주우며 걸었다. 소윤이는 뭔가 모으는 걸 참 좋아한다. 어제 찾았던 조개껍데기도 집까지 가지고 간다고 정성스럽게 담아놨다.
한껏 여유를 부리고 나온 만큼,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바로 차에 타고 식당으로 갔다. 오늘도 서윤이가 차에서 잠들었다.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들어갔고, 난 어제처럼 차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막국수를 먹으러 갔다. 갈비탕도 팔길래 전병도 함께 시켜서 아이들과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네 가지 종류의 전병이 나왔고 안 매운 전병을 아이들에게 줬다. 서윤이가 먹고 인상을 쓰며 뱉길래 뜨거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매운 거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먹기에도 맵다고 했다. 덕분에 아내와 나만 포식했다. 물론 소윤이와 시윤이도 갈비탕을 맛있게 먹기는 했다. 서윤이는 갈비탕에 든 고기도 안 먹었다. 아내가 혹시 몰라 준비해 간 김에다 밥을 싸서 먹였다. 메밀국수도 맛있었고 전병도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생선구이만큼 바쁘지 않아서 맛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바로 근처에 있는 선사 유적 박물관으로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수준에 딱 맞을 것 같았고, 옛날 사람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소윤이가 재밌어 할 것 같았다. 날씨는 엄청 추웠다. 바람은 아침보다 더 세차게 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 안으로 이동하는 그 잠깐 사이에도 절로 호들갑을 떨게 되는 추위였다.
박물관에도 사람은 없었다. 정말 하나도 없었다. 안내하시는 직원 한두 분을 빼면 우리 가족뿐이었다. 박물관 전체를 대관한 느낌이었다. 서윤이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이곳저곳 헤집고 다녀도 부담이 덜 해서 좋기는 했다.
아내와 나는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느라 바빴다. 기왕 온 거 의미 있는 관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중간에 한 번씩 밑천이 드러나며 설명이 막힐 때도 있었지만 설명판을 흘깃거리며 열심히 지식을 전수했다. 규모가 매우 작긴 했지만 일일이 설명하면서 관람하니 그래도 시간이 꽤 걸렸다. 마지막에는 체험의 탈을 쓴 놀이(?) 순서도 있어서 그것도 한참 했다. 바닥으로 내려 간 서윤이가 물 만난 고기처럼 여기저기 활보했다. 다른 관람객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갑자기 얻게 된 이틀 덕분에 그저 행복하고 좋았는데, 오늘이 되니 ‘어느새 내일이 마지막 날’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아쉬움을 떠올릴 때마다 어제 그 흥분의 순간을 언급했다. 표현은 어제와 똑같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면서.
박물관 옆 갈대숲을 산책하는 것도 정말 하고 싶었지만, 부는 바람이 보통이 아니었다.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산책은커녕 주차장까지 잠깐 걷는 것도 힘들었다. 사진만 후다닥 찍고 차에 탔다.
“우와. 소윤아, 시윤아. 이렇게 차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 정말. 이렇게 추울 때도 피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 감사에 관해 이야기 할 때마다 ‘과연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찔릴 때도 많다. 내가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전하는 감사는 음식에 관한 감사뿐이다. 가르침과 삶의 괴리가 거의 없는 영역이다. 차가 있는 건 감사하지만 더 좋은 차를 타고 싶은 욕망이 언제나 들끓는 것과는 다르게.
저녁에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는데 고기는 아주 조금만 샀다. 딱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정도만. 아내와 나는 김밥과 라면을 먹기로 했다. 몸과 마음에 쌓인 경험의 세포들이 ‘고기 많이 사 봐야 정신만 없을걸?’이라고 충고했다. 불판 위에 딱 한 번에 구울 수 있는 양이었다. 절편도 사서 같이 구웠다. 아내는 고기를 먹으며 (사실 거의 먹지도 않았다. 아내는 자기 친구의 표현처럼 자기도 '정신이 없으면 먹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계속 이 얘기를 했다.
“여보. 고기를 조금만 산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서윤이는 고기는 아예 안 먹고 밥과 떡만 먹었다. 떡이 없었다면 아마 진작에 아내가 서윤이를 데리고 먼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딱 좋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기분 좋게 잘 먹고 아내와 나도 지나치게 힘을 쓰지 않고. 다 먹고 정리를 하며 나도 총평을 남겼다.
“여보. 배가 부르긴 한데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네”
아내도 격렬하게 공감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다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주 강하게 원했다. 다섯 명이 들어가면 거의 움직이기 힘든 정도긴 했지만 그래도 들어가는 건 가능했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노곤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서윤이를 데리고 먼저 나가도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그러라고 해서 서윤이만 데리고 나왔다. 아내는 소윤이, 시윤이와 남았다.
서윤이는 내 주위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노는데 난 졸음이 몰려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서윤이를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윤이에게 슬쩍 물어봤다.
“서윤아. 아빠랑 가서 누울까?”
“으?”
“아빠랑 가서 코 잘까?”
“데에”
얼른 방에 이불을 펴고 서윤이를 눕혔다. 나도 서윤이 옆에 누웠다. 서윤이는 바로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가슴을 토닥거리는 것도 막지 않았다. 불을 끄고 완전히 깜깜하게 만들면 정말 잠들 것 같았다. 다만 아내와 아이들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잠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정도로 빨리 잠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계속 토닥였다. 재우는 건 나였는데 내가 자꾸 졸았다. 조느라 토닥거리는 걸 멈추면, 서윤이가 내 손을 잡고 자기 가슴 위로 갖다 올렸다. 그래도 토닥이지 않으면
“아빠아아”
하면서 날 불렀다. 다시 토닥이기 시작하면 손을 빨기 시작했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잠들었을 텐데, 마침 소윤이와 시윤이가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으은니?”
서윤이는 언니의 소리를 듣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아빠가 너무 거저 먹으려고 했지?
아내가 애들을 다 재우고 나온 시간이 10시였다. 왜 그렇게 늦었는지 모르겠다. 아내를 기다릴 때도 계속 졸았다. 원래 여행은 피곤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날의 연속이니까. 오늘도 아내와 영화를 봤다. 요즘에는 웬만하면 영화 보다가 졸지 않는데 오늘은 끝나기 직전에 자꾸 눈이 감겼다. 겨우 끝까지 봤다.
아무리 피곤해도 여행은 언제나 좋은데, 어느덧 마지막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