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7(토)
역시나 아이들은 자비가 없었고 주말의 아침을 일찍부터 밝혔다. 늦게까지 이어진 수다의 여파로 아내와 나는 둘 다 정신을 못 차리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다. 서윤이도 아침부터 얼마나 짜증을 많이 내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아내와 내가 둘 다 누워서 정신을 못 차릴 때는 그렇게 칭얼대던 서윤이는, 거실로 데리고 나왔더니 다른 아이가 됐다.
“서윤아, 배고파? 밥 줄까?”
“빠. 빠”
“알았어. 밥 줄게 조금만 기다려”
서윤이도 배가 많이 고팠는지 밥 준다고 했더니 얌전히 기다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토스트가 먹고 싶다면서 둘이 나가서 식빵을 사 오겠다고 했다. 둘이 편의점에 가서 식빵 사 오는 게 나름대로 재밌었나 보다. 카드를 주며 조심히 다녀오라고 했다. 단지 안에서 아주 짧은 거리를 움직이는 거지만 차가 오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는 주의와 함께.
서윤이는 계란밥을 줬다. 먹기 전에도 이미 ‘방 안의 서윤이’와 다른 서윤이었지만, 먹고 나니 더 다른 서윤이가 됐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오늘은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 모터쇼에 가기로 했다. 원래 차를 좋아하는 시윤이와 둘이 데이트를 할 계획이었는데 소윤이도 너무 가고 싶어 해서 시윤이와의 데이트를 미뤘다. 아내와 서윤이는 집에 남기로 했다. 아내는 서윤이를 데리고는 모터쇼 같은 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침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뭔가 눈치를 챈 서윤이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당연히 자기도 가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미리 한 번씩 ‘서윤이는 안 가고 언니랑 오빠만 갈 거야’라고 얘기를 해 줬는데 ‘설마 그럴 리 없겠죠’라는 듯 무시했다. 그러다 언니와 오빠가 신발을 신자 자기도 내복 차림으로 나가서 신발을 신었다.
“서윤아. 안녕. 엄마랑 재밌게 보내”
아빠와 언니, 오빠가 진짜 자기만 두고 떠나자 역시나 오열했다.
“가찌(같이). 가찌. 가찌.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래도 오래가지는 않고 금방 끝났다고 했다. 혼자 남은 건 외로워도 어쨌든 엄마가 있었으니까 그랬을 거다.
미리 찾아보니 예전에 비해 모터쇼 규모가 많이 줄어서 참가하는 업체도 적고 전시장 크기도 많이 작아졌다고 했다. 스윽 둘러보고 오면 오후 시간이 많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대가 무척 컸다. 작아진 규모를 굳이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거기 가면 차 엄청 많아”
“아빠. 다 타 볼 수도 있어여?”
“그럼. 마음대로 타 볼 수 있지”
“움직이기도 해여?”
“아, 그건 안 되고”
찾아본 대로 규모가 많이 작았다. 그래도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엄청 컸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 둘 다 처음에는 엄청 신기하게 구경했다. 여러 자동차에 직접 타 보기도 하고. 어른에게는 다 다른 차지만 아이들에게는 다 비슷한 차였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차에 다 타 보자고 하지는 않았다. 평소에 자주 보기 어려운 스포츠카나 특이하게 생긴 차 위주로 구경하고 타 봤다. 포르쉐나 마세라티 같은 브랜드의 최고급 차는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려야 탈 수 있었다. 우리는 그냥 눈으로 구경만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둘 다 트럭을 타 보고 싶어 했다. 아주 큰 수소 트럭이었다. 거기도 줄이 길었다. 그래도 그건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기 전부터 타 보고 싶어 했던 거라 기꺼이 기다렸다. 별 거 없었어도 안 탔으면 너무 궁금했을 거다. 그 옆에는 버스가 있었다. 내부를 사무실처럼 개조한 버스라고 했는데 거기는 줄이 더 길었다. 이때쯤에는 모두 약간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자동차를 워낙 좋아하고 관심도 많은 시윤이는 버스를 꼭 타고 싶어 했고, 소윤이는
“아빠. 저는 이거 꼭 안 타도 돼여. 근데 시윤이가 타고 싶어 하니까 기다리는 것도 괜찮아여”
라고 말했다. 소윤이에게는 ‘엄청 재밌는’ 모터쇼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래도 동생을 위해서 기꺼이 기다리고 힘든 것도 참는 게 의젓하고 기특했다.
한 30분은 기다려서 드디어 버스에 올랐다. 역시나 별 거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알던 버스와 달리 사무실처럼 아늑하게 꾸며 놓은 게 조금 특이했을 뿐.
“소윤아. 이제 나가야지”
“벌써여?”
“어. 원래 기다림은 길고 체험은 짧은 거야”
버스를 마지막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사실 저는 꼭 타 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여”
“어. 뭔데?”
“저기에 경찰차처럼 생긴 차가 있었는데 그걸 타 보고 싶어여”
“아, 그래? 알았어?
거기도 줄이 있기는 했는데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괜찮아?”
“힘들기는 한데 시윤이가 보고 싶어 하니까 기다릴 수 있어여”
“그래, 고마워”
생각한 것보다 오래 머물렀다. 힘들기도 꽤 힘들었고. 배도 엄청 고팠다. 전시장 근처에 있는 돈까스 가게에 가서 밥을 먹었다. 급히 찾아서 간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긴 했다. 식당 바로 근처에 소윤이와 시윤이가 좋아하는 (사실 아내가 더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가게도 있었다. 에그타르트 가게에 가려고 그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은 거였다.
“아빠. 이제 배불러서 못 먹겠어여”
라며 돈까스를 남긴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청 배고픈 아이들처럼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진심으로 맛있게, 감탄을 거듭하면서.
“아빠. 저는 세상에서 맑음케이크 에그타르트가 제일 맛있어여”
“아빠. 저두여. 너무 맛있어여”
아내에게 갖다 줄 에그타르트 한 개와 롤케이크도 하나 샀다. 집에 가는 길에는 무척 졸렸다. 시윤이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다. 나도 잠에서 깨고 시윤이도 깨울 겸 노래를 틀고 아이들이 웃을 만한 가사로 개사를 해서 소리를 지르며 불렀다. 한마디로 온갖 주접을 다 떨었다. 덕분에 시윤이는 웃느라 잠을 쫓아냈고 나도 졸음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서윤이는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언니와 오빠, 아빠를 찾았다고 했다. 잘 놀다가도 갑자기 언니와 오빠, 아빠를 부르며 두리번 거렸다고 했다. 다시 재회했을 때 서윤이는 방방 뛰며 우리를 반겼다. 특히 서윤이가 나에게 너무 잘 오고 먼저 와서 애교도 부리고 그래서 좋았다. 나만 느끼는 특이점이 있다. 평소와 다르게 나를 대하는 서윤이의 태도. 이전보다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듯한 그 느낌. 엄마에게 모두 할애한 지분을 나에게도 조금 나눠주는 듯한 그 느낌. 이 맛에 취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막내 막내 하는 거다.
집에 도착하고 나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점심을 워낙 늦게 먹어서 따로 저녁을 먹이지는 않았다. 간단히 요기할 것만 줬다. 아내가 아이들의 저녁 시간을 책임지는 동안 소파에 쌓인 마른 빨래를 베개 삼아 쪽잠을 잤다.
별 거 없었지만 한 번쯤은 같이 가 볼 만한 모터쇼였다. 나름의 데이트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빠와의 데이트’로 채운 하루를 만족스러워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 모터쇼 재밌었지? 아빠랑 데이트도 하고”
“네, 아빠 너무 재밌었어여”
소윤이와 시윤이도 엄청 피곤했을 테고, 서윤이도 일찍 낮잠을 잔 덕분에 아내가 꽤 금방 나왔다. 어제처럼 아내와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갑자기 온라인으로 처치홈스쿨 회의가 잡혔다. 꽤 늦은 시간에 시작해서 엄청 늦게 끝났다. 중간에 서윤이가 깨서 데리고 나왔는데 잠이 다 깨서 나온 건 아니라 비몽사몽이었다. 아내 품에 안겨 다시 잠을 청하던 서윤이가 갑자기 나에게 안기겠다며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것도 잠깐 충동적으로 안긴 게 아니라 아예 한참 내 품에 안겨 있다가 잠들었다.
여행하는 동안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해서 그런가. 아무튼 분명히 달랐다. 하루 종일 서윤이와 분신처럼 붙어 지내느라 오히려 ‘아 좀 떨어지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아내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다.
’떨어져 있을 때의 그리움’과 ‘들러붙을 때의 쾌감’
이 기세를 몰아서, 자러 들어갔을 때도
“서윤아. 아빠 옆에서 잘까?”
라며 호기롭게 제안했지만 대차게 거절당했다.
“아아앙. 암마아”
아무리 지분을 많이 가져도 어차피 대주주는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