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할머니, 내일도 할머니

21.11.28(주일)

by 어깨아빠

아내와 어제 자러 들어가기 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여보. 내일은 내가 일어날게”

“왜?”

“아, 그냥. 오늘 여보가 일찍 일어났으니까. 여보 좀 더 자라고”

“됐어. 아무나 일어나면 되지 뭐”


그 ‘아무나’는 아내가 됐다. 됐다며 패기를 부리던 나는 홀로 방을 지키며 늦잠을 잤고.


몇 주간 예배 시간마다 유모차에 앉아 알아서 잠들던 서윤이가 오늘은 엄청 활발했다. 아주 잠깐 안겨 있다가 신발을 신겨 달라고 하더니 참 바쁘게 움직였다. 의자에 오르내리고 유모차에 오르내리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서윤이 덕분에 항상 맨 뒤에 앉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그래야만 한다). 서윤이가 소리만 내지 않으면. 시끄럽게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아내와 내가 바빠진다.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리거나 중얼거리는 소리든 뭔가 요구가 수용되지 않아서 짜증 내는 소리든 소리가 나면 조치를 취하게 된다.


주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오늘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아기띠만 해도 조용해졌다. 내가 안아준다고 해도 엄마를 고집하지 않길래 내가 안았다. 그러고 나서는 엄청 금방 잠들었다. 예배가 끝나고 차에 앉혔을 때도 깨지 않아서 푹 재웠다.


점심 먹으러 자주 가는 식당이 오늘은 문을 닫았다는 걸, 아내의 친구를 통해 미리 들었다. 다른 곳에 가느니 집에 가서 먹자고 했다. 월 말 생활비 운용과도 관련이 있는 결정이었을 거다. 아, 아닐지도 모르겠다. 장을 보는 비용이나 사 먹는 비용이나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집에 가는 길에 장을 봤다.


점심은 파스타를 해 먹기로 했다. 시판 소스가 있어서 자신 있게 내가 하겠다고 했다. 소스 없는 파스타는 두렵지만 소스와 함께하는 파스타는 파스타도 아니다. 역시나 모두 맛있다고 했다. 서윤이는 파스타 소스에 밥을 비벼서 줬다. 나에게 먹으라고 하면 먹지 못할 음식(?)이었지만 서윤이는 맛있게 먹었다. 빈 그릇을 몇 번이나 더 채워가면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수시로


“아빠. 오늘 축구 같이 갈 건지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면 말해 주세여”


라고 얘기했다. ‘오늘은 날이 좀 추워서 같이 못 갈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더니 언제 결정을 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소윤아, 시윤아.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너무 추울 거 같아”


소윤이와 시윤이가 너무 간절하게 가고 싶다고 했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특히 소윤이는 약간 귀찮기도 하고 다른 친구가 오지 않으면 재미도 덜 하고 그래서 집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어 보였다.


거기에다가 마침 (내) 엄마에게 전화가 왔는데, 김장을 다 했으니 김치를 가지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내가 내일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기로 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 기쁜 소식 덕분에 이미 들뜨고 신났다. 축구 따위 가지 못하는 아쉬움보다는 내일 할머니를 만나서 논다는 설렘이 훨씬 컸다. 사실 미안한 건 아내한테 제일 미안하지 뭐.


축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마주쳤다. 급히 인사만 드리고 바로 헤어졌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저녁까지 다 먹은 뒤였다.


“소윤아, 시윤아. 엄청 좋았겠네? 할머니랑 할아버지 오셔서? 많이 놀았어?”

“아니여어. 별로 못 놀았어여어”


시윤이가 괜히 꼬아서 얘기를 했다. 물론 웃는 얼굴로 하는 장난이었다. 다행이었다.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덜 미안했다.


“아빠 따라서 축구 안 간 보람이 있었네”


소윤이와 시윤이는 웃음으로 동의했다.


애들은 씻고 자기만 하면 되는 거라 애들이 자러 들어갈 때까지 씻지 않고 기다렸다. 오늘도 여러 번 뜬금없이 나에게 달려와서 안긴 서윤이가 저녁에도 그렇게 와서 안겼다. 나와 밀착이 되면 나의 땀 냄새가 옮겨 갈까 봐 최대한 거리를 두고 안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와, 아빠 땀 냄새 많이 난다”


라며 얼굴을 찡그렸는데 서윤이는 그런 것도 못 느꼈는지 내 옆에 잘도 붙어 있었다. 축구장에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계속 사람 옆에 붙어서 알짱거리고 애교를 부리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녀석을 보니 계속 서윤이가 생각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러 들어가는 순간에도 내일 할머니와 만나는 걸 생각만 해도 좋다면서 즐거워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고 나서야 샤워를 하고 혼자 식탁에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먹고 남긴 탕수육과 군만두를 먹었다(남긴 음식을 처량하게 먹은 게 아니라 맛있게 먹었다). 유튜브를 보며 여유롭게. 원래 혼자 밥 먹는 걸 매우 싫어하지만 아이 셋과 지지고 볶는 삶을 살고 나서부터는 가끔씩 이런 고독한 식사 시간이 반갑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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