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9(수)
아내와 아이들이 하루 종일 좋아 보였다. 물론 실제로야 매 순간 그렇게 좋을 리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평소에 비하면 훨씬 그래 보였다.
소윤이는 오전에 한참 동안, 거의 한 시간도 넘게 엄마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마음으로 낳은 작은 아기(인형) 둘과 막내아들 시윤이까지 총 자식 셋을 둔 엄마를 자처했다. 아내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자꾸 시윤이한테
"엄마 말에 순종하세여"
"아니에여. 그렇게 하지 않아여"
이랬단다. 억하심정도 풀고 나름의 메시지도 던지는 건가? 소윤이의 근황을 전해주던 아내가 커피는 다 마시고 없는 커피잔과 책을 찍은 사진을 보내줬다. 사진만 봐서는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커피와 함께 독서 좀 하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아서 커피만 흡입했다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윤이랑 시윤이가 둘이 워낙 잘 놀아서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책도 일고, 성경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곧바로 소윤이랑 시윤이가 노는 동영상도 도착했다. 여전히 소윤이는 엄마, 시윤이는 아들인 상황극에 열심이었다. 소윤이야 그렇다 쳐도 시윤이가 누나의 장단에 엇나가지 않고 끝까지 맞춰 주는 게 신기했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홍상수(다른 영화감독이 생각나지 않는다)표 영화 같은 극사실주의 상황극을 지향하는 소윤이의 까탈스러운 요구에도 시윤이는 호흡을 잘 맞춰줬다. 덕분에 최대 수혜자는 아내가 되었고.
오후에는 파스타를 앞에 두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소윤이 사진이 도착했다. 프레임 안에 시윤이가 없는 걸로 봐서 아마 시윤이의 낮잠 시간이 아닐까 추측했는데 맞았다. 시윤이가 자는 틈을 이용해 소윤이랑 같이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소윤이 표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소윤이 나름대로의 소확행인가.
그러고 나서 아내는 스타필드에 갈 거라며 그리로 퇴근하라는 카톡을 남겼다. 505호 사모님이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는 만날 수가 없으니, 아내는 매우 허전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그런가 보다. 딱 이런 날, 이런 시간에 부담 없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좋은 육아 동지가 잠시 휴무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스타필드에 도착해 아내에게 안부를 물으니 그래도 괜찮았다고 했다. 시윤이가 유모차에 오래 앉아 있어 준 덕분에 같이 여기저기 구경도 할 수 있고 그랬다면서. 다만 그러고 나서 내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는 아내에게 엄청 엉겨 붙고 그래서 힘들었다며 억울해했다. 내가 나타나고 나서는 시윤이는 거의 천사였다.
아내는 애들 저녁 먹일 때 같이 구워 주려고 소고기를 샀다. 집에 와서 포장을 뜯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이거 얼마나 구워?"
"그냥 다 굽자. 다 구워서 우리도 같이 먹지 뭐"
아내가 산 소고기는 190g이었다. 아내는 정말 고기에 대해서는 아무 개념이 없나 보다. 마치 내가 수학을 대할 때처럼. 애들만 구워줘도 빠듯해 보이는데 다 같이 먹자니. 일단 다 굽기는 했다. 양파랑 파, 버섯도 때려 넣고 함께 구웠다. 밥이 아직 덜 됐는데 밥 달라고 보채는 시윤이 덕분에, 먼저 고기를 잘라서 놔줬다. 시윤이는 게 눈 감추듯 고기를 먹어 치웠다. 소윤이도 잘 먹었다. 역시 아내 빼고는 다 육식파다.
나도 구우면서 몇 점 집어 먹었는데 맛이 있긴 했다. 애들 먹일 거라 핏기 없이 바짝 익혀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내 몫의 고기도 좀 남겨 놓고 애들한테 고기를 배분해줬다.
"여보. 고기는 여보 먹어"
"아니야. 난 집어 먹었어. 여보 먹어"
"난 고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안 좋아해도 이건 먹어. 몸보신 해"
몸보신 치고는 양이 너무 적었지만, 그래도 아내에게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소윤아 나중에 아빠는 소고기 싫어한다고 하면 안 된다. 아빠 엄청 좋아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아빠는 소고기가 싫다고 한 적 없다.
"아빠. 왜 시윤이는 부드러운 부분 주고 나는 질긴 것만 줬어여?"
"아니 그럴 리가. 시윤이는 작게 잘라 주다 보니까 부드러워졌고, 소윤이는 크게 잘라 줘서 질긴 부분이 좀 있었나 보지. 소윤이 크게 잘라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빠. 왜 시윤이한테만 예쁘게 말하고 나한테는 그렇게 안 해여?"
"아니야. 소윤이한테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빠. 왜 시윤이한테만 그렇게 해 줘여? 나는 안 해주고?"
"소윤이도 해주면 되지. 이리 와"
부쩍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훈육한답시고 소윤이한테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표현되는 시윤이를 향한 다정함을 경계하는 건지. 소윤이가 클수록 섬세한 감정선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혼날 때도 소윤이는 나의 말투나 행동의 분위기를 얘기할 때가 많다. 원인이 된 상황보다 그게 우선인 것 같다. 꼭 아내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같이 사는 입장에서야 섬세한 감정을 읽어주지 못하면 돌아오는 서운함의 표현이 조금 피곤할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없는 능력치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형의 딸(소윤이랑 같은 나이)은 이제 화장실 갈 때나, 샤워할 때 아빠는 못 들어오게 한다는데. 다행히 소윤이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런 걸 점점 여자가 되어 간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점점 딸 키우는 느낌이 확실해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소윤아. 아빠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러니까 나가라고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