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의 계절

18.12.20(목)

by 어깨아빠

오후에 통화하는데 아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어서 답답했는지 커피 마시러 가고 싶다길래 그럼 퇴근하고 나갔다 오자고 얘기했다. 통화를 끊고 보니 애 둘 데리고 커피 마시러 가서 얼마나 카페인을 음미하고 오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니면 난 운동하고 갈 테니까 (내가) 애들 재우고 여보는 나갔다 오던지]

아내는 즉시 화답했다.


[오 이런 배려]

아내가 아침에 목도 칼칼하고 머리도 띵한 것이 꼭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한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마음의 병이 나으면 육신의 병도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언제든 나갈 수 있으니, 힘들면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아내의 자유시간을 예정해 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시윤이 열 나"

"진짜? 몇 돈데?"

"38.1도"

"병원 가 봐야 하나?"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럼 내가 시윤이 데리고 갔다 올까. 여보는 소윤이랑 집에 있고"

"그래도 되겠네"

아내의 자유시간은 안타깝게도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아빠"

"어. 소윤아"

"어. 어. 그런데 나도 병원 같이 가도 돼여?"

"소윤이도 가고 싶어?"

"네. 나도 가서 구경만 하고 싶어여"

"그래. 소윤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

아내가 이어받았다.

"여보. 소윤이 말은 나는 집에 있고 여보랑 애들만 가자는 얘기야"

"알아. 나도. 여보는 우리 병원 간 사이에 커피라도 사 와"

"아. 그럴까?"

"마시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가? 나가는 게 중요한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안 그래도 장도 좀 봐야 해서"

집에 도착하니 아내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냥 같이 가게"

"아. 왜?"

"나도 가서 진료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긴 그렇겠다"

한동안 병원에 발길을 끊고 살았는데 지난주, 이번 주 도대체 몇 번을 가는 건지. 온 가족이 또 병원에 총출동했다. 시윤이 열의 원인은 미세한 중이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대유행 중인 독감이 아니라는 사실에 일단 안심을 했다. 시윤이는 다행이었는데 아내가 문제였다. 오히려 아내가 독감 의심 판정을 받았다. 성인이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가능성도 크지만, 문제는 전염력이었다. 전염력은 그대로라 애들한테 옮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셨다. 나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약을 복용하는 걸 보며, 다시 한번 허약 체질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한 방에 훅 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곤 한다. 진심으로. 특히 30 중반 줄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마치 현실이 된 양 두려울 때도 있다.)

소윤이가 오리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며, 돌아오는 길에 한살림에 들러 오리고기를 샀다. 소윤이의 주문은 구체적이었다. 오리고기를 넣은 주먹밥. 부지런히 오리고기를 굽고 밥이랑 버무려서 주먹밥을 만들어 줬다. 정작 소윤이는 너무 졸려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오히려 시윤이가 무서운 속도로, 주먹밥을 만들어서 놔주기가 무섭게 먹어치웠다. 그렇게 먹고도 부족했는지 더 달라고 칭얼댔다. 밥은 다 먹고 없어서 고구마로 남은 허기를 채우도록 했다.

아내는 오늘도 자기가 재울 테니 운동하고 오라며 떠밀었다. 몸이 안 좋은 아내에게 모두 떠맡기는 게 왠지 찝찝해서 (굉장히 미온적으로) 사양했지만 아내는 괜찮다며 사양을 사양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가고 난 어질러진 거실을 대충이나마 치우고, 화장실도 갔다가, 어영부영 30여분을 보냈다. 방 안이 조용하길래 다 잠들었나 궁금해서, 베란다로 가서 안방 쪽 문에 플래시를 비추고 들여다봤다.

맙소사.

시윤이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손가락을 빨고 있었고, 더군다나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급히 몸을 빼고 시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내는 잠든 것 같았다. 다행히 시윤이가 방 문을 열고 나오지는 않길래 안심하고 운동하러 갔다. 계획했던 것의 절반 정도 운동을 했을 때,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마카롱 먹고 싶다]

아내는 잠든 게 아니었다.

[마카롱 사다 줘, 마카롱 사 와]도 아닌 [마카롱 먹고 싶다]

표면적으로는 그냥 자기감정, 욕구의 표현이지만 의역하자면 사 오라는 말이겠지. 운동 끝나고 카페에 들르려고 했는데, 일단 마카롱을 대령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스타벅스에 들러 바닐라 마카롱을 하나 사 가지고 집에 갔다. 마카롱을 전달하고 난 다시 나올 생각이었다.

"여보. 오늘 늦게 자지 마"

"......"

"여보. 몸이 안 좋잖아. 그럴 때는 일단 약 먹고 빨리 자야지"

"나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러다 내일 심해지면 어쩌려고"

"졸리지도 않은데"

"안 졸려도 누워 있으면 잠 와. 소윤이한테도 맨날 그러면서"

"아. 알았어. 일찍 잘 게"

"10시에 자"

"10시는 너무 빠르다. 10시 30분"

"알았어. 약속 지켜"

"아아아아. 11시"

뭐지. 이 강소윤 시니어 같은 느낌은. 어쩜 이렇게 비슷하지.

카페에 가서 열심히 글을 쓰고 11시 조금 넘어서 나왔다.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 집을 올려다보니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또. 말 안 듣고 놀고 있구만'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분명히 켜져 있던 거실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거짓말, 꼼수의 영역에 있어서는 아내는 내 손바닥 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내 인기척을 감지하고 급히 자는 척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내는 자고 있었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여보. 여보. 일어나. 안 자는 거 다 알아"

아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자는 척 해"

라고 얘기하며 플래시를 아내 얼굴에 비췄다. [형사 25시] 같은 프로그램에서 용의자가 형사에게 발각되었을 때처럼, 아내는 민망한 웃음과 함께 형체를 드러냈다.

솔직히 속마음은 화가 났지만(평소에야 그렇다 쳐도, 아플 때까지 안 자고 버티겠다는 건 도대체 누굴 위해서, 무얼 위해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소윤이한테도 맨날 몸이 안 좋을 땐 일찍 자는 거라고 가르치면서) 잘 누르고 웃으며 마무리했다.

여보. 제발 부탁인데 몸이 영 이상하면, 일단 약 먹고 푹 좀 자. 그놈의 웹툰 좀 그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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