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2(목)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축구 가방부터 챙겼다. 아내는 축구하러 가는 남편을 위해 어젯밤에 나가기 전에 세탁기도 돌려놓고 자기 전에는 건조기도 돌렸다. 난 기독교인이라 적절하지 않은 비유지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보통 이렇게 표현하더라.
“아니 전생에 무슨 나라를 구했나. 어떻게 저런 아내를 만났지?”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때 연락이 왔다. 여러 이유로 오늘 축구가 취소됐다는 소식이었다.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아내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사실 아내에게는 내심 좋은 소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내는 당연히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꼭 축구가 취소된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저녁에 왠지 밖에 나가고 싶었다. 뭔가 놀고 싶기도 했던 것 같고. 퇴근하기 직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건지 물어봤다.
“오늘 시켜 먹으려고”
“아, 진짜? 왜?”
“그냥”
“그래? 그럼 우리 그냥 밖에 나가서 먹을까?”
“왜?”
“그냥. 너무 힘들려나?”
서윤이의 방해 때문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잠시 후 카톡을 보냈다.
“배달시켜서 집에서 먹고 나가든지 할까?”
“그래”
집에 도착했더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인사를 하고서 급히 식탁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았다. 물론 모르는 척했다. 둘 다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웬 편지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모르는 척하고 서윤이와 놀면서 기다렸다. 어차피 배달시킨 음식도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아내는 수제 버거를 시켰다고 했다. 그것도 의아했다. 평일 저녁에는 한 번도 시켜 먹어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선택이었다.
잠시 후 소윤이가 먼저 편지를 줬다. 소윤이 편지를 보고 나서야 모든 상황이 조금씩 이해가 됐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아빠 오늘 축구 취소돼서 속상하죠. 제가 돈 줄 테니까 아빠도 오늘 나갔다 와여’
시윤이 편지는 간단했다.
‘아빠 사랑해여’
간단했지만 시윤이에게는 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시윤이가 직접 글씨를 써서 준 편지는 오늘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에는 주로 그림이었다. 아니면 대필이었거나.
수제 버거도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된 결과였다. 원래 나를 일찌감치 내보낼 생각에 내가 먹을 것만 시키려고 했고, 그게 버거였다. 막상 내 것만 시키려니 금액도 안 되고 그래서 다 함께 버거를 먹게 된 거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에게 나가라고 했다. 축구가 취소된 남편과 아빠를 위로하기 위한 고심 끝의 결론이었다. 무슨 큰일이 난 것도 아니고 고작 축구 취소된 건데, 사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나가는 아빠와 남편을 원망해도 모자랄 판인데 위로라니. 이 정도면 전생에 나라 정도 구해서 될 일이 아닌 듯하다.
점심에 워킹맘이신 과장님, 둘째 아들이 중학생인 50대 이사님, 아직 싱글인 내 또래 남자 직원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사님이 결혼 안 한 30대 남자가 제일 부럽다면서 농담을 던지셨다. 남자가 가장이 되면 어깨의 짐이 상상도 못하게 무겁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과장님은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지훈씨는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뭐 짐이라기보다는 부담이 느껴질 때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 힘으로 사는 거죠 뭐. 전 애들이랑 아내 힘으로 일하죠”
아주 가볍고 흘러가듯 대답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럽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걷는 공원에서 혼자 반대 방향으로 걷는 느낌이기도 하고, 혼자 애써 연기하는 거라는 오해를 살 거 같기도 하고.
오늘의 내 삶을 보면,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한 듯하다. 어디 감히 축구 얘기를 꺼내냐고 면박을 먹어도 시원하지 않을 판국에 위로라니. 위로라니.
아내와 아이들의 마음만 받고 나가지는 않으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나가서 카페에 가는 것이 딱히 좋지 않았다. 아니, 옛날만큼 큰 감흥이 없었다. 그때는 카페가 유일한 탈출구(?)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고 나서 싱크대 앞에 앉아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예능 영상을 봤다. 서윤이가 헤집어 놓은 비닐장갑을 정리하려고 앉았다가, 한참을 정리하고 난 뒤에 그대로 눌러 앉은 거다. 하여간 엉덩이를 붙이면 기본 30분이다.
그러다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하다가 좀 늦게 집에서 나왔다. 아내가 어제 갔던 카페에 갔다. 역시나 옛날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선뜻 되지는 않았다.
‘아, 그냥 가영이랑 둘이 왔으면 좋았겠다’
이게 내 마지막 결론이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남편이 마치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는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카페의 문을 닫는 시간이 아직 30분 남았을 때, 카페에서 나왔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에서 좀 더 시간을 보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뭔가 더 좋았다. 내 공간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뭔가 다락방의 감성이 느껴지는 건가. 아무튼 차에서 남은 시간을 더 보냈다. 문득 ‘혼자 캠핑하면 좋겠네’ 생각도 들었다(캠핑 경험은 없다).
카페도 좋고 차박도 좋고 캠핑도 좋고 다 좋은데, 다음 주에는 축구가 취소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