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5(주일)
뭔가 새벽부터 시끄럽기는 했다. 형님(아내 오빠)네 부부는 아침 일찍 돌아갔고, 아이들은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했다. 거실 한복판에 누워서 자느라 모든 소란을 다 느끼긴 했는데 그렇다고 또 완전히 깨지도 않았다. 꾸역꾸역 잠을 이어가다 일어났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열심히 장기를 가르쳐 주시는 장인어른의 목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나도 어제 나름대로 끈기를 가지고 알려 줬는데 결국 지치기는 했다. 장인어른은 안 힘드셨는지 궁금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주제를 모르고 자기들이 할아버지를 이긴 거냐며 승부를 따졌다.
요즘 자고 있으면 서윤이가 자꾸 내 물건을 나에게 갖다 준다. 오늘도 일어나 보니 휴대폰과 시계가 머리맡에 있었다. 눈을 떴을 때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달려와서 내 얼굴을 만지며
“압빠아? 압빠하하하”
라며 좋아했다. 애들 아침은 장모님이 다 해결해 주셨다. 나는 씨리얼을 먹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느라 시간이 좀 촉박했는데 주인분께서 체크아웃 시간을 한 시간 늦춰 주셨다. 짐은 아내가 미리 다 싸 놔서 예배드리고 나서는 잠시 한량처럼 누워서 쉬었다. 누워 있는 아빠에게 장난을 치는 서윤이와 누나가 장기를 너무 오래 둬서 속상한 시윤이가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점심 먹기에는 조금 시간이 이르기도 하고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되기도 해서 숙소에서 나와서 바로 카페로 갔다. 작년 초에 우리 가족끼리 갔던 카페에 갔다. 그때는 서윤이가 아내 뱃속에 있었다. 덕분에 그때 사진을 찾아봤는데 다들 아기였다. 소윤이도 아기 티가 팍팍 묻어났고 시윤이도 훨씬 아기 같았다. 그리고 나도. 1년 반 사이에 참 많이 늙었다.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늙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어린 날이라는 명언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따라서 바깥에 나갔는데 금방 다시 돌아왔다. 목줄을 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개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마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아는, 주인도 있는 강아지인 듯했다.
점심도 근처에서 먹었다. 주인아저씨께서 엄청 수준 높은 접객을 하는 곳이었다.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지배인으로 일하셨나 싶을 정도의, 보통의 식당에서는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부드러움과 절제미가 느껴지는 연륜이 묻어나는 친절이었다. 사장님은 시윤이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우리 자리로 다가오셔서 아이들을 흐뭇하게 쳐다보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셨다.
“아이고, 누가 이렇게 기도를 예쁘게 했어요? 우리 공주님이 했어요?”
사장님은 머리를 묶은 시윤이의 뒷모습을 보시고 오해를 하신 듯했다. 시윤이가 아들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나서 장모님이 바로 질문을 하셨다. 서윤이를 가리키면서.
“얘는요? 아들 같아요? 딸 같아요?”
“머슴아 아니에요?”
서윤아. 아직 멀었지? 이게 너의 현주소란다. 오빠는 딸로 보는데 넌 머슴아로 보는 현실. 분발하자. 정수리와 뒤통수, 옆통수의 모공들아.
서윤이는 밥 먹다 말고 잠들었다. 거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내 기억에는 처음이었다. 식당이 좀 나른하긴 했다. 적당히 따뜻하고 잔잔한 캐롤도 나오고. 서윤이는 묵전과 밥을 열심히 씹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아주 깊이. 차에 태워서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걸 무척 아쉬워했다. 식당에서 나와서 할아버지 차 옆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우리 차 옆에 선 아내와 나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일이 생기기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다. 1박 2일의 여행이 좀 그런 것 같긴 하다. 평소에 비하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렇다고 또 실컷 보냈다고 하기에는 좀 모자라서 헤어질 때는 언제나 아쉽나 보다.
늦은 오후에 집에 도착했다. 난 바로 옷을 갈아입고 축구하러 나왔다. 날씨가 따뜻하길래 소윤이와 시윤이도 데리고 갈까 싶었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고민 끝에 집에 있겠다고 했다. 두고 가길 잘했다. 해가 지니 엄청 추워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왔으면 아마 중간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저녁 먹고는 오랜만에 밤산책을 나갔다. 아내에게
“여보. 우리 밤산책 나갈까? 여보 빵도 살 겸?”
이라고 물어봤더니 아내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먹을 빵도 사고 아내가 먹을 빵도 샀다. 물론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일 먹는 거고 아내는 오늘 먹는 거고. 유모차에 앉아 있던 서윤이는 중간에 꺼내 달라고 했다. 이 또한 흔쾌히 꺼내서 안았다. 다만 나도 두꺼운 옷을 입고 서윤이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으니 안는 게 꽤 힘들었다. 내려 주고 걷게 했는데 놀이터 근처에서 자꾸 놀이터로 가려고 하길래 다시 안고 강제로 이동했다.
여행이라고 내가 한 건 없었는데 엄청 피곤했다. 거기에 밤산책 덕분에 아이들의 취침 시간도 무척 늦어졌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돈 건데. 물론 아내 말처럼
“여보. 밤산책은 언제나 좋다.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기분이 무척 좋긴 하지만 애들을 재우려고 시계를 보면 흠칫 놀라게 된다. 거기에 축구의 여파도 더해진 듯했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간 사이에 소파에 앉아서 한참 동안 졸았다. 거의 잤다고 봐야 할 정도로. 아내도 엄청 늦게 나왔는데 그때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