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08(수)
아내는 어젯밤부터 오늘의 일정을 버거워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굵직한 약속이자 일정이 두 개가 있었는데 일정 하나하나가 힘들다기보다는 ‘오늘의 일정’을 소화해 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사실 부담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오늘을 피하고 싶다’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오늘도 아내에게 성경 구절과 함께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다행히 큰 두 개의 일정을 마치고 나서 통화했을 때, 아내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오늘 괜찮았어? 안 힘들었어?”
“어, 좋았어”
언제나 약간의 연기와 가면은 존재하겠지만. 아무튼 다행이었다. 버겁게만 느껴지던 하루를 나름대로 건강하게 보낸 거 같아서. 사실 아내는 생각보다 강인한 면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이런 날들의 연속이라도 잘 넘기는 편이기는 하다. 부디 아내의 속이 나도 모르게 상하고 문드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살필 뿐이다.
어제 자기 전까지만 해도 내일이 축구하러 가는 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었다. 아내에게도 일찌감치 소식을 전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축구가 아니었더라도 오늘 저녁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아내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늘 잡혀 있던 다른 일은 얼마든지 내일로 미룰 수 있어서 더 다행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아직 애들 저녁을 먹이기 전이었다. 뭘 먹일지 마땅히 정하지도 않은 듯했다. 그냥 집에 있는 반찬으로 먹일 거라는 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퇴근과 동시에 옷을 갈아입고 나간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아낌없이 반겼다.
내 옆에 딱 붙어서 아빠를 불러대며 이것저것 참견하는 서윤이와 무심한 듯하지만 아빠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두고 가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일은 없었다.
“얘들아, 아빠 갈게”
“아빠 안녕”
“압빠아아아아. 안냐아아아앙”
“여보. 갈게”
“어, 여보”
아내에게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사다 주느냐고 물어봤는데 한사코 괜찮다고 했다. 몇 번을 물어봤는데도 같은 대답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메시지를 보내 놓으라고 얘기하고 집에서 나왔다. 당연히 아내가 마음이 바뀌고 메시지도 보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축구를 마치고 집에 오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커피 안 마셔?”
“괜찮다니까”
“왜. 한 잔 마셔. 사 줄게”
“여보도 마실 거야?”
“여보 마시면 나도 마시지”
“여보는 마시고 싶지 않은데 괜히 나 때문에 마시는 거면 나 진짜 안 마셔도 돼”
“아니야. 나도 마시면 좋지 뭐”
“그래? 알았어. 그럼”
원래 배달을 시킬까 하다가 차라리 내가 갔다 오는 게 더 빠를 거 같아서 직접 가기로 했다. 배달이야 최소 주문 금액이 있으니 나도 마셔야 하지만 직접 갈 거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땀이 식으니 무척 춥기도 해서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족인 나도 찬 커피 생각이 싹 사라졌다. 아내의 커피만 한 잔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따뜻한 커피와 함께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했고 난 샤워하고 나와서 시리얼을 먹으려고 그릇에 담았을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서윤이가 등장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문 근처에 와서 엄마를 부르는 게 전부였던 녀석이 이제 키가 커서 직접 문을 열고 나온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급히 가서 서윤이를 안았고 서윤이는 엄마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암마아아아”
“서윤아. 엄마 없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서윤이 엄마 보고 싶어?”
“으아아아아앙. 네에에”
“근데 엄마가 없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다른 날에 비해 뭔가 진정되는 게 느렸다. 잘 진정이 되지도 않았고. 그 사이 아내는 커튼 뒤로 숨었고 난 서윤이에게 엄마가 없다는 걸 확인시켜 줬다. 그래도 계속 엄마를 찾았다. 방에 들어가서 눕혀 보기도 했는데 자는 듯하다가 다시 엄마를 찾으며 울고 그랬다. 아내는 아직 소화가 덜 돼서 그대로 잠들기 싫다고 했다. 서윤이를 데리고 들어가면 분명히 잠들 텐데 그러기에는 아직 속이 더부룩하다는 말이었다.
“여보. 그럼 서윤이 그냥 데리고 있지 뭐”
결국 서윤이에게 엄마의 존재를 솔직히 밝혔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안고 있기로 했고. 서윤이는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많이 웃고 장난도 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나에게는
‘좀 들어가서 자라’
하는 마음이 0.0001%도 없었다. 그저 막내였다. 그저 사랑이었고.
아침까지 또렷한 정신을 유지할 것 같던 서윤이는 어느새 졸음에 휩싸였고, 거실에 누워서 잠들었다. 그것도 아주 곤하게. 아내와 내가 여기저기 주무르고 만져도 깨지 않을 정도로.
“여보. 막내는 진짜. 사랑 많이 받고 자라네”
“그러게. 그냥 너무 예쁘네”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아 아들 둘을 낳고 난 다음에 서윤이를 낳았으면 진짜 얼마나 좋았을까.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