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3(월)
아내에게 밥 굶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애들 차려 주고 나면 식욕이 똑떨어져서 안 먹는 경우도 많고, 식욕은 없지만 생존을 위해 먹으려고 해도 애들이 생각보다 잘 먹어서 아내 먹을 밥이 안 남을 때도 많다. 오늘 아침에는 쌀을 미처 못 사서 밥을 못하고 즉석밥을 데워 줬는데 아이들이 남김없이 다 먹었다고 했다.
아침은 그렇게 때웠다고 해도 (아내는 굶었지만) 당장 점심에 먹을 쌀이 없으니 사러 나갔다 와야 한다던 아내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몰아치는 일상과 집안일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또 밥때가 되었을 거다(아니면 이미 지나쳤거나). 파스타를 시켜서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었다고 했다. 아내 입에는 그렇게 맛이 없었는데 애들은 잘 먹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특히 서윤이가 엄청 잘 먹었다고 했다.
점심을 실패한 아내에게 저녁도 외식을 제안했다.
“저녁에 맥칸? 지출 초과인가?”
며칠 전에 소윤이와 시윤이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다. 토요일에 한의원에 갔을 때도 의사 선생님이 고기를 많이 먹이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나도 치킨이 먹고 싶었다. 점심에 헛돈을 써서 속이 쓰린 아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렸다. 아내도 ‘치킨의 필요성’을 십분 느꼈는지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치킨 두 마리를 들고 퇴근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얼른 치킨을 꺼내서 서윤이가 먹을 몫을 잘게 잘랐다. 미리 그렇게 해 놓지 않으면 ‘지금 당장 치킨을 대령하라’는 재촉과 마주해야 한다. 한 서너 조각을 집어서 먹기 좋게 살만 발라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제 완전히 자기들이 알아서 먹는다. 발라 줄 필요가 없다. 지난번에 치킨 먹었을 때는 치킨에는 손도 안 대고 떡만 먹었던 서윤이가 오늘은 꽤 잘 먹었다. 다행이었다. 집에 밥도 없어서 서윤이가 그거 안 먹겠다고 했으면 줄 것도 없었다. 먹은 조각 수로 따지면 아내가 가장 조금 먹었다. 소윤이가 아내와 비슷하게 먹었고, 시윤이는 아내보다 두 배를 더 먹었다. 나도 배불리 먹었다. 그래도 치킨이 남았다. 맛만 보는 것으로 끝내도 흔적이 남지 않는 음식도 많은데. 이래서 내가 아이들과 치킨 먹는 걸 좋아하나.
서윤이는 치킨으로 장난을 치길래 그러지 말라고 엄하게 얘기했더니 내 눈치를 살살 살피고는 웃음을 팔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보란 듯이
“네에에. 네에에에. 네에에에. 네에에에. 압빠아아아. 네에에에”
를 반복하며 대답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훈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그 뒤에도 한 번 더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때도 비슷했다. 차라리 아예 말을 안 들으면 모를까 은근한 능청스러움을 덧입혀서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이래가지고 훈육이 될까.
“소윤아, 씻자”
“아빠가 얼마 만에 씻겨 주는 건지?”
다 먹고 씻자고 소윤이를 불렀더니 저렇게 얘기했다.
“뭘 얼마 만에 씻겨. 계속 아빠가 씻겨 줬지”
“아니에여. 어제도 제가 씻고”
“어제? 그런가? 그저께는?”
“그저께도 혼자 씻었져”
“아니지. 토요일에는 아빠가 씻겨 줬지”
“토요일에 우리 뭐 했져?”
“아, 아빠 저녁에 나갔구나”
“그래여. 금요일에는?”
“금요일에는 진짜 아빠가 씻겨 줬다”
“맞네”
씻겨 주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녁을 다 먹고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화장실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먼지. 소윤이는 여전히 ‘이틀의 공백’도 ‘얼마 만이냐’고 느끼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자러 들어간 방에서 한참 동안 소리가 났다. 서윤이 목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또 잠 안 자고 장난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듯했다. 방문이 열리면서 아내의 목소리도 동시에 들렸다.
“엄마 나갈 거니까 서윤이 혼자 누워서 자. 자꾸 그렇게 돌아다니고 장난칠 거면”
아내는 나오자마자 거실에 엎드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보지 못했는데, 서윤이가 득달같이 아내를 따라서 뛰어나오는 그 모습이 웃겼나 보다. 결국 서윤이는 이번에도 별다른 훈육 없이 훈방조치 됐다.
고맙다, 서윤아. 이 맛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