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22(토)
며칠전부터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지만, 사 먹자니 아깝고 해 먹자니 귀찮아서 애만 태우고 있던 아내를 위해 김치찌개를 끓였다. 태어나서 김치찌개는 처음이었다. 망했다. 마지막에 마스코바도인지 뭔지 설탕 대용으로 한스푼 더 넣은 게 화근이었다. 어디 가서 돈 주고 사 먹었으면 딱 싫었을, 달짝지근한 김치찌개가 되었다. 착한 아내는 맛있다고 잘 먹어줬다. 애들은 삼치를 구워서 줬다. 일일이 손으로 가시를 찾아서 발라줬다.(아내가 평소에 그렇게 하더라) 그러고 나서는 설거지까지 (내 기준으로는) 완벽하게.
"여보. 오늘 너무 달리는 거 아니야?"
"괜찮아"
축구하러 나갈 때만 집안일에 열심을 내는 남편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완벽하게 자의에 의한, 목적 없는, 헌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실천이었다. 설거지를 비롯해 소소한 주방 정리와 식탁정리까지 마치고 나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참 달았다.
"나 커피 마시고 나서 커튼 달까?"
"그래. 그럼 되겠다"
거실 커튼을 새로 사면서 안방 커튼도 새로 산 게 한참 되었는데, 거실 커튼만 교체하고 귀찮아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원래 달려 있던 커튼봉이 떨어지면서 한동안 안방에는 커튼을 달지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여러모로 불편했다. 밤에는 바깥 불빛이 새어 들어와서 애들 잠을 방해할까 봐 걱정이었고, 아침에는 뜨는 태양의 밝은 빛을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했다. (다르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더 어둡게 해서 애들을 오래 재우는 데 방해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아서 미루고 있다가, 얼마전에 이케아에 가서 커튼봉을 사 왔다.
결혼하고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류의 집안일은 시작하기 전에는 별 거 아닐 거라고 얕잡아 보다가 호되게 당하곤 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머리로 계산했을 때는 브라켓은 드릴로 드르륵 순식간에 박아 버리고, 봉 끼워서 착착착착 커튼 달면 끝이었다. 한 30분 예상했다. 벽에 구멍 뚫고 나사 돌리고 이런 일은 언제나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늘도 1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자 고무적인 건 어찌됐건, 완수했다는 거다. 두 아이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나는 가운데서도 새 커튼을 무사히 달았다.
소윤이도 그러긴 했지만, 시윤이가 유난히 깔깔거리면서 웃고 장난도 많이 치고 기분이 좋았다. 애들이 기분이 좋으면 당연히 부모도 나쁠 게 없지만, 흥분이 과해지면 왠지 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적당히 기분 좋은 게 좋지, 주체 못하는 흥을 마구 발산하는 상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유발한다. 오늘 시윤이처럼.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내일 교회에서 성탄전야축제가 있는데 소윤이도 새싹꿈나무 소속으로 무대에 설 예정이었다. 장르는 찬양과 율동. 요 몇 주 동안 새싹꿈나무 예배에는 갔어도, 목자 집사님 방에서 안 나왔다는 걸 보면, 주일에는 연습을 못한 것 같다. 대신 집에서 아내랑 틈틈이, 꾸준히 연습했다.
오늘 오후에 단체 연습이 있어서 교회에 가야했다.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갔다. 난 교회에 오며 잠든 시윤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교회 카페에서 기다렸다. (차분하게 썼지만 매우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가 중간 중간 카페에 와서 상황을 전해줬다.
처음에는 엄마랑 안 떨어지겠다고 했지만 결국 엄마랑 분리되어 연습에 참여했다. 그래도 시골 마을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지 않고, 꽤 열심히 찬양도 하고 율동도 했다고 한다. 매우 궁금했지만 참았다. 아내가 찍어 온 사진과 동영상으로 만족했다.
연습을 마치고 온 소윤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소윤아. 연습 잘 했어?"
"아빠. 내가 처음에는 엄마랑 안 떨어진다고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떨어지고 찬양도 하고 율동도 했어"
"그랬어? 잘 했네. 그럼 내일도 잘 할 수 있겠네"
"내일 파주 할머니, 할아버지도 오신대?"
"글쎄. 시간 되면 오신대"
성탄절의 참 의미와 누구를 위한 발표회인지 진지하게 설명해도 아직 소윤이한테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인가 보다. 몇 번이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참석 여부를 물었다.
소윤이의 연습이 끝나고, 아내는 소윤이와 함께 차를 타고 홈스쿨 부모교육 모임 장소로 갔다. 난 시윤이랑 교회에 남았다. 이번 성탄절에 시윤이가 유아세례를 받는데 오늘 세례문답에 참석해야 했다. 아내랑 소윤이가 연습을 마치고 떠날 무렵 시윤이가 깼다. 처음에는 계속 엄마를 찾으며 울려고 했다. 아내가 시윤이 몰래 사다 준 고구마와 우유가 신의 한 수 였다. 그걸 먹은 뒤로는 조금의 징징거림이나 울음도 없었다. 짧기는 했지만 세례문답 시간에도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자기 또래 다른 아이들이 신기했는지 30분 내내 다른 애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으? 아?"
나한테 뭔가 얘기를 했다. 알아 듣지는 못했다. 동생이나 형, 누나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엄청 놀란 표정으로 계속 나한테 얘기했는데 알아 먹지는 못했다.
문답 마치고 나서 시윤이랑 같이 택시를 타고 부모교육 장소로 갔다. 시윤이랑 우리 차를 타고 둘이 다닌 적은 있어도, 택시를 타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 차 없이 시윤이랑 다닌다는 건 이동할 때 아기띠로 시윤이를 안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다. 어깨와 허리가 아프기는 해도 그만큼 가까이 밀착해 있을 수 있다. 시윤이도 고구마 섭취 이후로는 계속 기분이 좋아서, 달달한 사랑 영화 한 편 찍었다. 다정하게 말하고, 웃고, 뽀뽀하고. 택시 안에서도 계속 바깥의 차를 보느라 정신 없었다.
"빠바?"
"응. 빵빵. 자동차"
"부우우"
"부우우우웅. 자동차"
"빠바아아앙"
"빠방. 시윤이 자동차 좋아?"
"으"
"네. 해야지"
"뒈에"
강의가 끝나기 전 들어갔는데, 어렴풋이 [고생하셨어요]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고생하지 않았는데. 나름 자유도 누리고, 시윤이랑 데이트도 해서 좋았는데.
소윤이는 홈스쿨 동지(?)인 시안이가 오지 않아서 슬펐다가 3살 많은 언니가 있어서 금방 우울함을 떨쳐냈다. 시윤이는 오히려 여기 와서 더 많이 울고 보챘다. 이 곳은 경쟁사회니까. 거 봐. 아빠랑 있을 때가 좋았지? 소윤이야 딸이니까 별로 걱정을 안 하는데(방심하는 건가?) 시윤이는 아들이라 걱정이 많다. 나같은 아들이 될까 봐. 오늘처럼 언제라도 다정하고, 친구같은 그런 아들이었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품는 것과 그걸 살가움, 다정함이라는 실체가 있는 행동으로 옮기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부모교육 마치고 나서는 또 외식을 했다. 그것도 지난주에 갔던 곳에서. 소윤이의 뜻이었다. 돈까스와 파스타, 우동을 먹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우동은 막상 시켜 놓으면 잘 안 먹길래 설득해서 함박스테이크로 바꿨다. 지난주랑 다르게 시윤이가 엄청나게 협조적이었고, 소윤이도 열심히, 쉬지 않고 잘 먹었다.
메뉴는 세 개를 시켰다. 돈까스, 파스타, 함박스테이크. 오늘처럼 두 녀석이 잘 먹는 날에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다. 솔직히 아내랑 나랑 둘이 와서 메뉴 4개를 시켜도 먹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의 성인처럼 먹는 애 둘이랑 메뉴 3개를 시켰다. 코끼리로 빙의해서 반찬(?)으로 나온 샐러드를 비롯한 야채류만 막 집어 먹었다.
"여보. 좀 먹어. 왜 안 먹어?"
'내가 먹기 시작하면 모두가 배고플 테니까. 그냥 나만 배고플 게'
우리 바로 옆자리에 시윤이보다 어린 아이를 가진 젊은 부부가 앉았는데 마치 갓 들어온 신입사원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곱게 차려 입은 엄마와 아빠의 복장이 무색하게 전투적인 식사시간이었다. 어린 딸이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엄마의 스웨터 위에 안착한 밥풀떼기 몇 개가 안쓰러워 보였다.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으니 잘 시간이 한참 지났고, 소윤이는 순리대로 큰 저항 없이 잠들었다. 오늘도 시윤이가 반항아였다. 아내랑 누워서도 한참을 안 자고 버티길래 그냥 데리고 나왔다. 아내도 함께. 소윤이가 알면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겠지만(소윤이는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나온 적이, 내 기억에는 없다) 때아닌 자유를 얻은 시윤이는 신났다. 아내와 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소윤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시윤이를 예뻐해줬다. 자꾸 이러다가 정말 밤늦게 자는 아이로 변모하는 길을 열어주는 게 아닌가 아주 잠깐 염려가 되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한참을 놀고 난 뒤, 아내와 시윤이는 자러 들어갔다. 이번에는 소윤이가 아내의 잠을 방해했다. 안 좋은 꿈을 꿨는지 갑자기 깨서 짜증내고 우는 소리를 냈다. 잠꼬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아내의 잠을 방해하고 나서야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의 자정까지 육아가 이어진 셈이다. 시간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었어도.
하아. 알차다 알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