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조기 퇴근

22.01.17(월)

by 어깨아빠

서윤이를 일찍 깨워야 했다. 뇌파 검사할 때 약 먹고 한 번에 잘 재우려면 최대한 피곤하게 만들어야 했다. 늦게 재우고 일찍 깨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내가 일어날 때 아내를 깨웠다. 아내의 허벅지를 꽤 세게 흔들었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한 10초를 흔들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곧바로 서윤이도 깨웠다. 서윤이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정신을 못 차렸다.


다행히 서윤이는 금방 잠에서 깼고 기분도 괜찮았다. 졸린데 깨웠다고 울고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가 더 피곤해 보였다. 서윤이는 점점 전원이 공급되는 느낌이었는데 아내는 여전히 방전된 느낌이었다.


“여보. 오늘 잘 갔다 와. 서윤이도 오늘 검사 잘 받고 와. 알았지? 잠도 잘 들고 깰 때도 잘 깨고”


아내와 서윤이가 가서 검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많이 쓰였다. 검사가 이른 시간이라고는 해도 서윤이가 워낙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검사받을 때까지 기분 좋게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사무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아내가 전화를 했다.


“여보”

“어, 여보. 서윤이는 잘 있어?”

“서윤이는 잘 있어. 내가 문제야”

“왜? 졸려서?”

“어. 내가 누워 있다가 잠들었더니 서윤이가 와서 ‘엄마아아. 자지 마여어어’ 이러면서 깨웠어”


역시나. 서윤이보다 아내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아내와 서윤이는 병원에 잘 갔다. 서윤이는 제 시간에 약도 잘 먹고 잠도 잘 들었다. 아내는 잠든 서윤이 사진과 영상을 보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잠든 서윤이 사진을 보니 또 2주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냥 검사받으러 가는 건데도 안쓰러웠다. 아내도 나랑 비슷했나 보다.


“들어갔음. 같이 못 있으니까 되게 속상하구나”


검사받기 전에 먹는 것도 안 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먹였다. 서윤이가 무척 배고파 했다는데 깨고 나서도 바로 뭘 먹이면 안 된다고 했다. 아내가 검사 후 잠에서 깼을 때의 유의사항이 적힌 안내서를 찍어서 보내줬다. 병원에서 나눠 주는 안내서는 그게 뭐가 됐든 참 무섭다. 그거 보면 당장이라도 무슨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행히 서윤이는 안내서에서 경고한 여러 유의 사항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고 잘 깨어났다. 잘 깨고 잘 먹었다고 했다. 깨고 나서 거의 바로 통화도 했는데 목소리가 평소랑 똑같았다. 말투나 느낌도. 다행이었다.


아내는 바로 장모님께 간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좋은 시간이었을 거다. 아내는 가서 내내 해롱해롱 졸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한숨 푹 잤으면 좋았겠지만 아이 셋을 엄마에게 맡겨 두고 마음 편히 잠들기가 어려웠을 거다. 아마 장모님은 계속 ‘한숨 자’라고 했을 테지만.


마침 나도 일찍 끝났다. 집에서 가까운 동네로 외근을 나오게 됐고 일이 꽤 일찍 끝났다. 조기 퇴근은 언제나 즐겁다. 커피 두 잔을 사서 집으로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보다 조금 더 먼저 왔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깜짝 놀랐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얘기를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소윤이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아, 그래서 엄마가 아까 커피를 안 샀구나”


라며 웃음을 지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일찍 등장한 아빠를 보면 조건 반사를 하듯 보드게임을 꺼낸다. 업무시간 단축이 여러 면에서 선순환을 만들어 낸다는 걸 삶으로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은 곧 여유로운 마음을 유발한다. 넉넉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요구하는 보드게임을 즐겁게 했다.


“여보. 오늘 저녁은 뭐야?”

“그냥 볶음밥 해 먹을까 했는데. 새우 넣고”

“그래? 그럼 내가 할게. 여보는 좀 쉬어”


엄청 정성을 들여서 볶음밥을 만들었다. 평소 나의 행태에 비하면 아주 체계적으로. 마지막 플레이팅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소윤이가 나에게 소소한 편지와 종이접기를 선물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곧 아이들을 향한 내 마음이기도 하다.


“소윤아, 시윤아. 맛있어?”


둘은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진짜 맛있는지 없는지는 둘의 모습을 보면 다 티가 난다. 오늘은 둘 다 진심이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저녁 먹고 엄마 빵 사러 잠깐 나갔다 올까?”

“갑자기 왜여?”

“엄마. 빵 사러. 왜? 싫어?”

“아니여. 좋아여”


내가 바람이 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답답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저녁을 먹고 간단한 산책을 하러 나갔다. 코로나 시국에 잠겨 산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밖에 나가자마자 막 뛰어나가는 아이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서윤이가 거기 합류할 날도 얼마 안 남았을 거다. 아직은 유모차에 최대한 오래 머물도록 유인(?)하며 산책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와 오빠가 그네를 탈 때, 서윤이도 잠깐 유모차에서 내렸다. 다소 불쌍하기도 하지만 섣불리 땅을 밟게 하면 후폭풍이 너무 거세다. 오늘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야말로 단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쫓아다녀야 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이들을 눕히고 나니 평소와 거의 비슷한 시간이었다. 육아인의 삶에는 아주 독특한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회사에서의 퇴근은 곧 육아로의 출근이 된다. 회사에서 조기 퇴근하면 집으로 조기 출근하는 거다. 오늘도 육아로 조기 출근했으니 퇴근 시간도 빨라야 했는데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다.


육아 조기 퇴근의 이점은 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야근을 했다. 이 맛을 잊지 못해서 자꾸 불나방처럼 밤산책 밤산책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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