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질주처럼 속도감 있는 저녁

22.01.25(화)

by 어깨아빠

어제 카시트를 급하게 옮기느라 최소한의 결속만 해 놓고 나중에 더 단단히 한다는 걸 깜빡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안전장치로서의 역할은 충분했다. 만약을 대비해 최대한 단단히 결속을 하고 다니는 편인데 그걸 잊은 게 아침에 생각이 났다. 오늘따라 날씨도 궂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내에게 카시트에 관해 얘기해 주고 혹시 주차장에서 여유가 된다면 더 단단히 잠가도 된다고 얘기했다. 아마 못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지금 그대로 타도 안전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괜찮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의 예상대로 아내는 카시트 따위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함께 처치홈스쿨하는 선생님 집에 간다고 했다. 놀러 가는 건 아니었고 일종의 이동 학교 개념이랄까. 아이들에게도 미리 말해줬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함께 배우러 가는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이 크다. 말해줘도 아쉬운 마음은 피할 길이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가능하다.


“오늘 00네서 뭐 했어?”

“오늘 하나도 안 놀고 공부만 하다 왔어여”


퇴근한 나에게 이런 토로를 종종 한다. 오늘은 어떻게 질문을 했다.


“오늘 00네 잘 갔다 왔어? 재밌었어?”

“잘 갔다 오기는 했는데 뭐 딱히 재밌고 그런 건 아니었어여”


소윤이 다운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대답이었다.


아내는 저녁에 치과 진료를 예약했다. 지난번에 신경 치료를 한 이가 뜨거운 걸 먹을 때마다 아프다고 했다. 아팠다 안 아팠다를 반복했는데 오늘은 통증이 너무 심해서 낮에 급히 예약을 잡았다고 했다. 저녁에는 나의 목장 모임도 있었다.


내가 퇴근하면 아내는 바로 나가고 난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그 사이 아내는 진료를 마치고 서둘러 돌아와서 다시 아이들을 넘겨받고 난 목장 모임에 참여한다. 이게 아내의 계획이었는데 좀 빠듯해 보였다. 목자 집사님에게 오늘은 일단 듣기만 하다가 좀 늦게 화면을 켜겠다고 미리 말씀드렸다. 아내는 저녁도 못 먹고 나갔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서윤이는 얼떨결에 웃으며 엄마를 보냈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배고픈 거 괜찮으면 시간 좀 보내고 와도 돼”

“여보. 괜찮아. 이제 막 진료 끝남. 목장 모임 참석해야지”

“진짠데. 나 일단 들으면 돼. 어차피 30분 정도는 삶 나눔이야”

“사실 딱히 갈 데도 없고. 밥은 다 먹었어요?”

“응 누움”

“빠르네 엄청”


실제로 엄청 빠르게 진행됐다. 아니 진행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방에 들어가서 눕기 전에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사과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좀 미안하네”

“왜여?”

“아, 아빠가 퇴근해서 너네랑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누고 계속 빨리 잘 준비만 하라고 해서”

“괜찮아여”

“미안해. 오늘은 엄마도 치과 가시고 아빠도 목장 모임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좀 이해해 줘. 그래도 미안해”


엄마와 헤어질 때는 밥 먹느라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인사했던 서윤이는, 자러 들어가니 엄마를 엄청 찾았다. 어설픈 발음으로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엄마의 빈자리를 아빠를 통해 채우지 않고 언니에게 갔다. 언니에게 가서 안기고 언니 배에 눕고 그랬다. 막냇동생을 남다르게 사랑하는 소윤이는 또 따뜻하게 받아줬고. 아빠보다 언니인 게 신기하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흐뭇하기도 했다. 각각의 자녀들과 일대일로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가는 게 삶의 작은 꿈이었는데, 거기에 새롭게 추가된 게 있다. 자녀들끼리 데이트하고 여행 가는 거다.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서윤이는 잠들었고 소윤이는 아직 깨어 있을 때 나왔다. 아내는 이미 돌아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소윤아, 아빠 나갈게. 사랑해. 잘 자”

“아빠. 사랑해여”


소윤이의 반응을 잘 살피면서 인사를 했다. 어떤 날은 유독 아쉬워하고 혼자 있기 싫어하고, 또 어떤 날은 담담하게 잘 보내 주기도 한다. 오늘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잘 된 건지 엄마와 아빠의 상황을 잘 이해한 건지 그렇게 속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소윤이에게 마음을 담아 뽀뽀를 하고 빛의 세계로 나왔다.


엄청 짧은 시간이었지만 치열한 저녁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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