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1(화)
아이들이 언제 거실로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잠에서 깼을 때는 시윤이가 방에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완전하게 잠에서 깼을 때는 아내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했는데 8시였다. 아이들의 방해(?)가 없다고 해도 ‘알람이 울리는 시간’, ‘알람을 놓쳤다가 본능적으로 놀라서 일어나는 시간’ 이렇게 두 번은 깨는 듯하다. 8시쯤 깼을 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더 청하면 다시 잠들기도 한다.
오늘은 다시 자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밀린 일기를 틈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써야 한다. 밖에서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잘 놀다가도 수시로 투닥거렸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아이들 아침을 챙겨 주시는 듯했는데, 아마 밥 먹는 태도가 영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듣기에는 ‘너무나 사랑이 가득해서’ 절대 실현될 리 없을 것 같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온화한 엄포’가 자주 들렸다. 최후의 카드로 ‘아빠 나오셔서 혼나기 전에 얼른 제대로 먹어’도 등장했다. ‘너 자꾸 이러면 호랑이 불러온다’의 호랑이가 된 기분이었다.
눈이 많이 왔다. 잠깐 내렸는데 금방 쌓였다. 시윤이는 매우 초조했다. 눈이 쌓였으니 나가서 놀기로 했는데 어른들이 아침(이었지만 사실 점심이나 마찬가지였던)을 먹어야 했다. 시윤이는 그 사이 눈이 녹을까 봐 애가 탔다. 그래도 혹시 눈이 녹으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계속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만 녹고 나머지는 안 녹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윤이도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눈에서 놀만한 옷이 없다고 해서 서윤이는 그냥 집에 남기기로 했다. 낮잠도 재워야 했고. 자기 전에 언니와 오빠만 나가는 걸 보면 너무 속상할 테니 서윤이가 자러 들어가면 나가기로 했다. 서윤이는 즐겁게 인사하고 아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이들과 내 겉옷이 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방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누워 있던 서윤이가 맹수를 발견한 초식 동물처럼 벌떡 일어나서 눈을 댕그랗게 떴다.
“서윤아, 잘 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옷을 가지고 나오려는데 서윤이가 외쳤다.
“나도오오. 나도오오오. 나도오오 나가애여어어어”
어찌나 많이 컸는지. 이제 눈치까지 생겼다. 웬만한 수로는 속이기도 어려울 만큼. 그래도 다행히 끝까지 매달리지는 않았다. 장인어른과 함께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 나왔다. 근처에 큰 공원이 있어서 거기로 갔는데 눈이 녹기는커녕 하얀 눈밭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보자마자 흥분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소윤이와 시윤이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놀고 있었다. 대부분 썰매를 탔다. 경사진 곳에서 타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 엄마나 아빠(대부분 아빠)가 끌어줬다. 막상 타면 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아닐 테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금세 눈길을 거두고 눈을 뭉치고 굴리며 놀았다. 잘 뭉쳐지는 눈이라 굴리며 놀기가 아주 좋았다. 위험할 게 하나도 없는 널찍한 운동장이라 좋았다. 서윤이도 데리고 나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윤이가 노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오라고 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둘이 잘 놀았다. 장인어른이나 내가 뭘 따로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중간에 가끔씩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눈을 던지면서 눈싸움 상대가 되어 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날씨가 차고 바람까지 부는 데다가 어디 앉을 데가 없어서 계속 서 있어야 했다. 장인어른이 조금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슬슬 들어가자고 얘기를 했다.
서윤이는 깨어 있었다.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꼭 퇴근하는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 같았다. 잠에서 깨서 거실로 나왔을 때도 우리를 찾았다고 했다. 아마 자기만 남겨 두고 나갔다는 걸 알았을 거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서 낮잠 거부가 심해지나.
들어오는 길에 사 온 커피를 마시고 장인어른은 잠깐 눈을 붙이러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도 무척 졸렸다. 한 게 없다고 느껴져도 어쨌든 찬바람을 맞으며 눈밭에 서 있었던 게 매우 피곤했나 보다. 나중에 나도 방에 들어왔는데 자지는 않았다. 그냥 누워서 휴대폰 만지면서 좀 쉬었다. 자려고 하던 차에 저녁에 가까운 점심으로 먹을 피자가 도착해서 다시 거실로 나왔다.
“아이그, 소윤아. 너네 엄마, 아빠 데이트라도 좀 하고 오시면 좋을 텐데. 데이트도 못 하고”
“엄마, 아빠 데이트하고 와여”
장모님의 말에 소윤이가 대답을 했다.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발전해서 ‘정말 잠깐 나갔다 올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설날 당일이라 막상 나가도 문 연 곳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하면 ‘나가긴 어딜 나가냐’ 싶다가도 ‘카페라도 가면 되지’ 싶기도 했다.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장모님은 저녁까지 먹고 오라고 하셨지만, 아내도 나도 배가 너무 불러서 그러기는 힘들었다. 잠깐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정도 마시고 올 생각이었다.
“여보. 우리 영화 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막연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에 영화는 무슨 영화냐고 대답했는데, 막상 카페를 찾으니 아는 카페는 모두 문을 닫아서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갈구해서 얻은 데이트 시간은 아니어도 어쨌든 귀중한 시간이니, 검증(?)되지 않은 카페에 가서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었다. 마침 가까운 시간에 볼 만한 영화도 있었다. 계획을 급히 변경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여보. 그래도 커피는 한 잔 사서 갈까?”
“커피 못 마실걸? 영화관에서?”
“아, 그런가? 그렇겠구나”
아니었다. 찾아보니 물과 음료는 반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영화를 보기로 결정하기 전에 찾아둔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사기로 했다. 전혀 기대를 안 했는데 카페 분위기가 너무 괜찮았다. 그냥 커피만 사서 나오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우리 그냥 카페에 있다 갈까?”
“그럴까? 분위기가 너무 좋지?”
“그러게”
결국 다시 선회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위기만큼이나 커피도 맛있었다. 어디 공개는 못할 테지만, 아내와 내가 소장하기 위한 사진도 많이 찍었다.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애들 선물을 사서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안타깝게도 문을 연 곳이 하나도 없었다. 서점이며 마트며 모두 휴무였다. 선물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당장 아내와 내가 갈 곳도 없었다. 막상 또 카페에 어느 정도 앉아 있다 보니 카페에만 있다가 들어가는 게 아쉬웠다. 마트라도 열었으면 마트라도 구경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말 연 곳이 없었다.
아쉽지만 아내와 나의 데이트는 거기서 끝이었다. 아쉬운 대로 근처 동네의 빌라촌에 들어가서 차를 타고 빙빙 돌며 구경했다. 물론 그것도 10분 만에 끝이었지만. 아내가 처갓집 근처에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에 들러 보자고 해서 잠깐 들어갔다. 거기서 아이들에게 선물로 줄 견과 강정을 샀다. 아내가 나중에 마실 밀크티도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역시나 엄마, 아빠의 빈자리 따위는 느끼지 않고 잘 놀았다. 오히려 엄마와 아빠의 등장이 곧 귀가라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하루 더 자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다. 장모님도 내심 그걸 바라셨지만, 모두를 위해 마지막 하루쯤은 각자의 휴일로 즐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아이들을 모두 씻겨 놓으셔서 집에 와서는 옷만 갈아입히고 바로 눕혔다. 아내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아까 못 본 아쉬움을 그렇게라도 달래자고 했다. 새해 첫날, 서윤이가 몇 번이나 토한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멍청하고 속 편하게 봤던 영화가 우리의 마지막 영화였다. 서윤이가 토해서 깨는 바람에 마무리 짓지 못했었다. 그 당시 나의 일련의 말과 행동에 관해 막연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여전히 느낀다. 영화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 영화의 결말이 궁금하긴 하지만 왠지 이어서 보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영화는 재밌게 봤다. 서윤이도 안 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