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26(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아내의 상태는 딱히 더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39도에 육박하는 고열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뺀 세 명 모두 접수를 했다.
설마 했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아. 지금 일단 A형 독감 반응이 나오네요. 약 먹어야겠네요"
아주 작고 하찮은 병일지라도, 전문가이자 권위자인 의사 선생님에게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는 순간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다. 꼭 임신테스트기 같이 생긴 독감 진단 키트의 A라고 쓰인 부분에 선명하게 한 줄이 드러났다.
다행히 아이들은 다량의 콧물로 인한 기침일 뿐, 특별한 이상 증상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소윤이는 귀에서 대량(진짜 대량, 성인 기준으로 해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귀지를 빼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잔소리를 많이 하니까 본능적으로 귀지를 생산해서 일시적으로 청력을 후퇴시키고 있나?
병원 진료를 마치고 아내와 아이들을 파주에 데려다줬다.
아내의 모습은, 소윤이 낳고 처음 유선염에 걸렸을 때와 비슷했다. 증상도 비슷하고. 같이 일하는 형의 딸(소윤이랑 같은 나이)도 A형 독감에 걸려서 출근을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독감의 계절이 따로 없구나.
사무실에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밥은 몇 숟가락 못 떴고, 약도 먹자마자 다 토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약 못 먹는 아내인데, 타미플루는 구토를 유발한다는 후기가 많았다. 잠시 후 아내가 링거로 맞는 약이 있다며 알려줬다. 찾아보니 [페라미플루]라는 건데 타미플루는 5일 동안 먹어야 하는 대신, 이건 링거 한 방 맞으면 끝이라는 게 최고의 장점이었다. 단점은 무지 비싸다는 건데 우리에겐 실비 보험이 있었다. 일단 진료받은 병원에 전화해서 이걸 맞아도 되는지 물어보니 상관없다고 했다. 아내가 운정에 있는 병원 몇 군데에 전화를 해서 페라미플루도 보유하고 있고, 자기 병원에서 독감진단을 받지 않아도 링거를 맞을 수 있는 병원을 한 군데 찾아냈다.
"여보. 어디야?"
"어. 이제 병원에 막 들어왔어"
아내는 곧 쓰러져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20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페라미플루를 흡수했다. 일단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하고 나니 당장 오늘 밤이 걱정이었다.
소윤이, 시윤이만 내가 집에 데리고 가는 방법
소윤이는 두고 시윤이만 데리고 가는 방법(시윤이가 자꾸 엄마한테 엉겨 붙어서)
애들은 두고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첫 번째 방법을 택했다. 일단 아내랑 애들을 잠깐이라도 분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바이러스 전염도 방지하고, 아내의 완전한 요양도 보장하고. 애들을 분리시키는 건 애들한테도 별로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엄마야 아프니까 떨어지는 건데, 누나는, 동생은 왜 떨어지는지 납득하지도 못할 것 같고,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으르렁거리지만) 아내를 움직이게 하는 건 지혜롭지 않은 방법 같았고.
그리하여 퇴근하고 애들을 데리고 집에 가서 재우고, 내일 출근할 때 다시 파주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소윤이었다. 엄마하고 떨어지는 것도 싫어할 거고 할머니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것도 싫어할 게 뻔했다. 장모님에게 미리 계속 말해주기를 부탁드렸다. 중간에 아내에게 소윤이 반응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울먹거리면서 싫다고 했단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퇴근하고 파주로 갔다. 장모님이랑 애들은 어디 나갔는지 없었고, 아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아침이랑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좀 붙어서 잠깐이나마 수발을 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나까지 독감 환자가 되면 그건 그야말로 막장이니까. 아내가 독감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서, 주변의 많은 사람이 독감이라는 걸 알고 나서. 스스로 세뇌를 시작했다.
'지금은 안 된다. 아프려면 아내 다 낫고 그때 아파야 한다. 지금은 안 된다'
금방 장모님이랑 애들이 돌아왔다. 환한 얼굴로 들어오던 소윤이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의 퇴근 = 본인의 귀가 = 엄마와의 이별이라는 등식이 소윤이 회로에서 작동된 듯했다.
"소윤아. 뭐야 아빠 안 반가워?"
"..........."
"소윤이 집에 가기 싫어서 그렇구나"
"..........."
"소윤이 이리 와 봐"
이때, 못 이기는 척 나한테 오면 싫지만 받아들일 틈이 있다는 얘기고, 오지 않으면 생각보다 견고히 반대의 의사를 갖고 있다는 거다. 소윤이는 터덜터덜 나에게 와서 안겼다.
"소윤아. 집에 가기 싫어서 그래?"
"응"
"그래도 엄마 아프고 소윤이, 시윤이한테 옮기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건 알지?"
"응"
"그래. 아빠도 소윤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오늘은 소윤이가 엄마, 아빠 뜻에 따라줘. 알았지?"
"네"
애들 키우면서 막 예쁜 짓하고 애교 부릴 때도 기분 좋지만, 이렇게 나와 아내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게 느껴질 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으면서도 그 어린 마음으로 어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시윤이 따위(시윤아 미안)에게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이다.
다짐은 했어도,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몇 번이고 엄마랑 있고 싶다고 얘기했다. 말은 해도 단호함에 서려 있지는 않았다. 자기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얘기해도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소윤이는 유난히 졸려 보였다. 꾸역꾸역 두 녀석의 저녁을 챙겨 먹이고, 씻겨서 차에 태웠다. 아내는 여전히 방에 누워 있었다. 자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안 자고 있었어도 괜히 소윤이한테 얼굴 보였다가 이별의 시간이 길어질까 봐 안 나오고 있을 수도 있고.
소윤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유난히 졸려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늦게, 길게 낮잠을 잔 시윤이도 덩달아 잠들었다. 어리둥절했다. 시윤이랑은 야근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역시 효자인 건가. 둘 다 자니 일단 밤 시간이 수월해져서 좋기는 한데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도착하면 저 둘을 어떻게 집까지 옮길 것인가.
둘 다 한꺼번에 안고 가는 방법
한 명은 차에 두고 한 명을 올려놓고, 다시 내려와서 한 명을 데리고 가는 방법
한 명은 유모차에 태우고, 한 명은 안고 가는 방법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둘 다 안고 가는 건, 힘든 건 둘째치고 자세가 불안정해서 누구든 깰 것 같았다. 한 명씩 옮기는 건, 내 육아 정서상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고. 가장 무난한 방법을 택했다. 잠든 시윤이를 카시트에서 꺼내 유모차에 옮기고, 다시 유모차에서 꺼내 자리에 눕혀야 하는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다른 선택이 마땅치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해 유모차를 꺼내 놓고, 시윤이를 먼저 카시트에서 유모차로 옮기는데. 헉. 시윤이가 눈을 떴다. 애써 못 본 척 눈을 마주치지 않고 황급히 유모차 햇빛 가리개를 깊게 내렸다. 서둘러 소윤이를 꺼내 어깨에 들쳐 매고 유모차를 밀었다. 소윤이는 미동도 없이 계속 잤다. 먼저 소윤이를 방에 눕혀 놓고 유모차에 누워 있는 시윤이를 옮기는데, 눈을 뜨고 있었다.
"시윤아. 얼른 자"
"데에"
시윤이는 대답한 것처럼 금방 잤다. 일단 다행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내랑 카톡을 했는데, 다행히 아내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이제 앉아 있을 수도 있다면서.
아내가 택배가 와 있을 거라며 좀 챙겨 놓으라길래 문을 열고 나갔는데, 밖에 있던 유모차 위에 자그마한 미니 건빵 한 개와 전도지를 어느 교회에서 두고 간 게 보였다. 순간 어찌나 마음이 따뜻해지던지. 두 애들 챙겨서 눕히고 재우고 텅 빈,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없는 집에 홀로 있으려니 은근히 쓸쓸하고, 뭔가 고독한 느낌이었는데. 어느 교회에서 놓고 간 건빵을 보니, 혼자가 아닌 듯한 위로를 받았달까. 아날로그 한 전도 방법을 무시하고 터부시 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혼자 거실에 앉아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덜커덕하더니 시윤이가 방 문을 열고 나왔다.
"시윤아. 들어가"
"아아아아"
"아빠랑 같이 들어갈까?"
"으으"
"시윤이 혼자 들어가서 자"
"아아아아"
"아빠랑 같이 잘까?"
"으으"
"네 해야지"
"데에"
시윤이와 함께 방에 들어갔는데, 이 녀석이 살짝 잠이 깼는지 바로 잠들 것 같지 않은 눈치였다. 다시 잠들기를 기다리다가 나도 살짝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시계는 1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거실에 나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와서 누웠다.
아. 뭐지.
평소와 다름없이 널브러져 있는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 누웠는데 찾아온 이 묘한 느낌은. 아내의 공백에서 유발되는 건가.
한 손에는 소윤이 손, 한 손에는 시윤이 손을 잡았다. 그 오묘한 느낌은 오히려 증폭됐다.
마치 싱글파파 일일체험 같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