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27(목)
밤사이 날씨는 추워졌는데 방 베란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외풍은 심해진 느낌이었다. 베란다 창과 마주 닿아있는 매트리스 끝자락에 몸을 걸치고 자려는 소윤이, 시윤이를 옮겨 놓고, 혹시나 열이 나는 건 아닐까 수시로 이마에 손을 대보느라 깊게 자지 못했다.
내가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애들은 푹 잤는지 아침에 기분이 좋았다. 엄마를 찾기는커녕 일어나자마자 내 몸을 타고 놀며 깔깔거렸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아내가 어제 말해 준 준비물이 몇 가지 있었다. 체온계, 딸기, 콩나물무침, 기저귀 등. 어젯밤 미리 쇼핑백에 담아 뒀고, 딸기와 콩나물은 아침에 꺼내서 담았다. 애들 옷을 갈아 입히려는데, 시윤이 내복은 아내가 정확히 어디에 있다고 말해줘서 금방 찾았는데 소윤이 내복이 통 보이지 않았다. 날이 추워져서 차 타고 가는 동안 안 추우려면 너무 얇은 내복은 안 될 것 같은데 적당한 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뒤진 끝에 꽤 두껍고 안감도 기모로 되어 있는 걸 찾아냈다. 내복이 아닌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오늘 입힐 겉옷이 굉장히 펄럭거리는 거라 괜찮을 것 같았다.
"소윤아. 이제 양말 신자"
"아빠. 그거 내 거 아닌데?"
"아. 그래? 그럼 이건?"
"그것도 시윤이 꺼"
"그럼 이건?"
"그건 맞아. 내 꺼야"
분명하게 소윤이가 나보다 많이 알고, 도움이 되는 영역이 존재한다. 소윤이가 한 2년만 지나면 엄청난 잔소리꾼이 됨과 동시에, 준 아내급의 조력자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시윤이는 있지도 않은 엄마를 찾아대며(엄마한테 입혀달라고 하며) 옷 입기를 거부하는 통에 애를 먹었다. 어쩔 수 없이 완력을 사용해 제압했다. 요즘은 시윤이가 힘으로 제압당하면 굉장히 '억울한' 울음을 짓는다. 들으면 알 수 있다. 이게 슬픈 건지, 아픈 건지, 분에 찬 건지. 고집부리다가 제압당하면 분노가 서린 울음을 내뿜는다. 조여 오는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한없이 인격적으로 기다려주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헬스로 단련한 근육을 20개월짜리 아이를 꼼짝 못 하도록 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무의식 중에도 '엄마 없는 서러움을 참고 있는 소윤이, 시윤이'(따지고 보면 밤 시간 잠깐이지만)에 대한 배려와 관용이 평소보다 많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특히 소윤이를 향해서. 그래서일까. 소윤이랑 나누는 대화의 온도가 굉장히 따뜻하고 살가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서로.
소윤이와 시윤이를 다시 파주에 데려다줬다. 아내는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이긴 했다.
"좀 어때?"
"많이 나아졌어"
얼핏 봐서는 '많이'라는 꾸밈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건 비슷한데 움직임이 많아졌다. 어제, 오늘 그렇게 열심히 챙겨 놓은 준비물을 식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왔다는 걸 거의 다 와서 알아차렸다.
"여보. 다 챙겨 놨는데 놓고 왔어"
"어? 딸기도?"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본능적인 첫 반응을 숨기는 건 매우 어렵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처음 소식을 전했을 때, 아주 짧았지만 아내의 얼굴이 매우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름 나도 고생하고 있는 건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 반응을 보이나 싶어서. 애써 감추고 다음 수를 뒀다.
"점심시간에 갔다 올 게"
"괜찮겠어?"
파주에서 우리 집까지는 시간으로 따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반응은 완연한 찬성이었다. 사회 초년병 시절, 병원 내 편의점 점장으로 근무하며 자주 목격한 광경이 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어주는 사람을 향해 짜증 내는 장면이다. 꽤 많이 봤다. 애고 어른이고 휠체어에 앉아서 불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걸 참 자주 봤다. 우연찮게 그 이유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사소한 것들이었다. 제 3자가 보기에는 보살핌을 받는 자는 당연히 보살펴 주는 자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 않았다.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아내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그놈의 딸기를 아내는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성화였으니까. 출근하고 있는데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핫초코는여?"
"아. 맞다. 핫초코"
"핫초코도 놓고 왔어여?"
"어. 그러네. 미안. 아빠가 점심시간에 갖다 줄게"
"아빠. 됐어여"
엄마가 없어도 의연하게 자기 할 일 척척 잘하고, 아빠에게 큰 도움을 주는 소윤이가 기특해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핫초코를 하사했었다.
"소윤아. 이거 이따 할머니네 가면 할머니한테 타 달라고 해? 알았지?"
그것도 놓고 왔다. 점심시간 조금 전에 아내와 연락을 하면서, 점심시간이 되면 집에 갔다 오겠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다. 아내의 반응은 일관성 있었다.
"여보 점심은? 못 먹는 거야?"
"그냥 뭐. 봐서 편의점에서 사 먹으면 되지"
"여보가 점심 못 먹는다고 하니까 뭔가 미안한데"
일기를 읽으면, 아내가 분노할지도 모르겠으나(왜곡된 묘사이며, 본인이 천하의 나쁜 여자로 비칠까 봐) 난 그렇게 느꼈다. 점심시간에 돈까지 써가며(유료 고속도로를 이용해) 집에 갔다. 식탁 위에 곧게 선 쇼핑백을 집어 들고, 미쳐 버리지 못한 (상온에 방치된) 삼치도 집어 들었다. 우와. 날이 추워졌다더니 잠깐 삼치 처리하는 그 순간, 손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듣는 이 하나 없는데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하아. 추워. 하씨. 춥다 추워"
그 길로 파주에 가서 쇼핑백을 전달했다. 아내는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생기가 없고, 몸짓에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은 건 똑같았다.
"괜찮아? 나아지고 있기는 해? 나빠지지는 않고?"
"어. 많이 좋아지고 있지"
다행이었다. 어쨌든 나아지고 있다니. 소윤이는 장모님이랑 잠깐 마트에 갔고, 시윤이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낮잠을 자도록 만드셨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웠을 거다. 보는 순간 평화로운 오르골 자장가가 귀에 맴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시윤이의 낮잠 자는 모습을 짧게 관람하고 다시 회사로 갔다.
장인어른이 일찍 퇴근하셔서, 퇴근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장모님이 치킨을 한 마리 사 오셨는데, 그걸 먹고 또 간략하게나마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저녁을 두 번 먹는 느낌이라 혼란스러웠지만 군말 없이 먹었다. 아내가 갑자기 오늘은 애들을 파주에서 재워야겠다고 했다.
"왜?"
"그냥. 날도 춥고 하니까"
오늘 낮, 장모님도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낮에야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밤에는 집에 가서 재우면 되는 걸 굳이 독감 환자가 둘이나 있는 곳에 애들을 두겠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나와 일절 상의 없이 결정한 아내에 대한 본능적인 불쾌함 때문인지, 아무튼 아내가 나의 불편한 심경을 읽어냈다. 아내는 그냥 집에 데리고 가서 재우는 게 좋겠다며 다시 데리고 가라고 했다. 쓰잘 데 없는 오기와 뒤틀린 심사가 결합된 나는 그냥 파주에서 재우라며 사양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계시니 언성을 높일 수는 없고, 아내와 나 사이에 잔잔한 신경전이 전개됐다. 공은 소윤이에게 넘겨졌다.
"소윤아. 할머니네서 자고 싶지? 오늘 여기서 자"
"아빠는여?"
"아빠는 집에 가고"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여"
"진짠데?"
"장난치는 거잖아여. 다 알아여"
"아니야. 아빠는 진짜 집에 가야 돼"
"싫은데. 나 아빠랑 자고 싶은데"
당연히 손뼉 치며 좋아할 줄 알았던 소윤이의 반응이 조금 예상 밖이었다.
"소윤아. 어떻게 할 거야? 할머니네서 잘래? 아니면 집에 가서 아빠랑 잘래?"
"나 그냥 우리 집에 가서 잘래"
"진짜?"
"응"
"왜? 소윤이 할머니네서 자고 싶어 했잖아"
"아. 어제 막상 그렇게 해보니까 좋더라고"
모두들 웃음이 터졌다. '막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구사한 저 한 문장, 그리고 그때 소윤이의 표정이 너무 조화로웠고, 네 살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심하게 이질적이었다. 어쨌든 어제와는 다르게 매우 기쁘고, 즐겁게 소윤이는 본인의 집으로 귀가했다. 시윤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잠들었는데, 소윤이는 그렇지 않았다.
"소윤아. 소윤이는 걸어가면 안 될까? 시윤이가 잠들어서 안아줘야 하니까"
"싫어. 나도 안아줘"
견고했다. 어쩔 수 없이 시윤이는 유모차에 옮기고, 소윤이는 안고 지하주차장에서 집까지 올라갔다. 맙소사. 시윤이가 잠에서 깼다.
"거 봐. 시윤이 깬다고 했잖아"
소윤이에게 무의미한 푸념을 던졌다. 다 씻고 왔으니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시윤이도 충전이 됐는지 쉽사리 잠들지 않았고 소윤이도 꽤 한참 걸렸다. 덕분에 나도 살짝 잠이 들었다가 깼다. 어젯밤 깊게 자지 못한 후폭풍인지, 아니면 겨우 이틀이지만 뭔가 신경이 곤두 선 탓인지, 일찍 피로가 몰려왔다. 아내가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 물론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윤이가 덜컥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대로 자리를 정리하고 자러 들어갔다) 어제처럼 양 손에 소윤이, 시윤이 손을 잡았다. 세상에 이렇게도 듬직하고 포근한 순간이 있을까.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가 제일 듬직했는데, 아내가 없으니 애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