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29(토)
아내의 독감 증상은 거의 사라지고, 기침만 남았다. 주말과 겹친 김에 주말에 푹 쉬라고, 이번 주말까지는 웬만한 육아나 집안일은 내가 다 하겠다고 공표해 놨다. 아침에도 애들을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가 누워 있는 방 문은 잠그고 나왔다.
"아빠. 찰흙 해도 되여?"
습관+본능적으로 찰흙은 안 된다는 대답이 차올랐지만, 사실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안 돼. 그거 치우려면 아빠가 너무 귀찮고 성가시거든"
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커다란 상을 펴주고 찰흙도 꺼내 줬다. 시윤이의 끊임없는 방해와 파괴만 잘 막아주면 제법 괜찮은 놀이다. 소윤이가 워낙 좋아한다. 오늘도 꽤 오랫동안 찰흙을 가지고 놀았다. 물론 돌격하는 시윤이를 막아내고, 막혀서 짜증 나는 시윤이를 달래느라 애를 먹기는 했다. 이제 시윤이가 점점 말귀를 정확히 알아 들어서 소윤이 편만 들어주는 척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시윤이는 다 알아듣고 싫은 티를 팍팍 낼 때가 많다. 누나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와서 얘기하고.
시간이 좀 지나고 아내도 일어나서 나왔다. 아내가 나오고 나서 아침 준비를 했다. 장모님이 사 주신 소고기를 구워 주고, 장모님이 준비해 주신 도라지 무침을 주고, 장모님이 마련해 주신 버섯볶음을 줬다.
요즘 소윤이는 [30분 안에 식사 마치기]를 훈련 중이다. 한 시간씩 걸리기도 하는 소윤이의 식사 태도를 개선하고, [감사히, 열심히]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못 지키면 그다음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물 말고는 어떠한 것도 먹지 못하는 벌칙이 적용된다. 그동안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실패를 맛보라고 만든 규칙이 아니고, 오히려 반복되는 성공의 경험이 자연스레 습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밥 양도 줄여주고, 호응도 해주고 하는 노력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처음으로 소윤이가 시간 안에 밥을 다 먹지 못했다.
"소윤아. 약속한 대로 긴 바늘이 6에 갔지? 소윤이는 밥 다 안 먹었고. 이제 끝. 점심 먹을 때까지는 간식 없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심 '설마. 진짜 그러겠어' 하는 마음이 있었던 소윤이는, 단호한 아내와 나의 태도에 울음으로 응수했지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소윤이에게 듣기 좋게 설명해줬다.
"소윤아. 엄마, 아빠는 소윤이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니지? 소윤이가 밥을 안 먹어도 사랑해. 소윤이가 좋은 행동, 바른 행동을 해야 하니까 지금 훈련하고 있는 거야. 간식 못 먹는 건 못 먹는 거고, 아빠랑 엄마랑 재밌게 노는 건 또 다른 거야. 다음 밥 먹을 때 열심히 먹으면 돼. 알았지?"
금방 진정되고 상황을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가해진 일시적 간식 박탈의 형벌도.
소윤이는 도서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육아 열외라 내가 둘을 데리고 가야 했는데, 내가 힘든 것도 그렇고 시윤이랑 가면 시윤이 쫓아다니느라 소윤이한테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주기 힘들다는 게, 유경험자인 아내의 조언이었다.
"소윤아. 그런데 시윤이랑 가면 아빠가 책 읽어주기도 힘들 텐데?"
"그래도여. 시윤이도 같이 읽어주면 되지여"
늘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세상 둘도 없이 관대하고 낙관적인 성인군자가 따로 없다. 시윤이가 졸려 하는 게 보이길래,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소윤아. 그러면 우리 시윤이 재워볼까? 유모차에 태우고 도서관에 가는 동안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아"
나가려고 씻으러 들어간 사이, 아내가 찰흙과 온갖 장난감을 소윤이와 함께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역시. 집에 온 이상 완전 열외는 불가능한 일이다.
엄청나게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윤이랑 시윤이에게 두텁게 옷을 입히고 목도리와 모자까지 동원해 가릴 수 있는 곳은 최대한 가렸다. 내가 느끼기에도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데, 소윤이는 일단 밖에 나온 것 자체가 신났나 보다. 총총총총 도서관을 향해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유모차에 앉은 시윤이를 몰래 훔쳐봤는데 안타깝게도 자지 않고 있었다. 졸린 건 분명한 데 잠들지 않으니 자꾸 미련이 남았다.
"소윤아. 바깥은 추우니까 계속 걸을 수가 없고, 우리 도서관에 들어가서 조금 더 돌아보자. 그러면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자여"
도서관 1층 통로(약 20여 미터?)를 수도 없이 돌았다.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성 무너뜨리기도 아니고, 소윤이랑 손 붙잡고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라며 계속 돌았다.
"소윤아. 시윤이 자?"
"아니여"
한 번씩 소윤이에게 시윤이가 자는지 보게 했는데, 시윤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더 돌아야 되나,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꺼내 줘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때쯤, 소윤이가 기쁘게, 하지만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하빠하, 차혀 차혀"
우왓. 시윤이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문채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있었다.
"소윤아. 됐다. 드디어 잔다. 우리 다섯 바퀴만 더 돌고 책 읽으러 가자"
"잠들었는데 왜 더 돌아여?"
"어. 더 깊게 자라고"
도서관 관리하시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유모차를 지정된 장소가 아닌 소윤이랑 내가 앉아서 책 읽을 곳에서도 보이는 곳에 갖다 놨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소윤아. 읽고 싶은 책 골라와 봐"
역시 소윤이는 곰곰이 책을 한가득 가지고 왔다. 열심히 읽어줬다. 좀 더 내용이 좋은 책, 유익한 책을 골라서 읽어주고 싶은데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애들 책 훑어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윤이가 골라 온 10권 정도의 책을 다 읽고, 리틀 성경동화를 들이밀었지만 재미없다며 거절당했다. 소윤이는 한번 더 대여섯 권의 곰곰이 책을 골라 왔다. 곰곰이 책도 뭐 내용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다. 나 말고도 아빠랑 둘이 온 아이들이 꽤 있었다. 토요일 오전에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오다니.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는 몰라도, 고양시 덕양구에 좋은 아빠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4시에는 부모교육을 들으러 가야 했다. 도서관에를 1시 넘어서 갔으니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2시 넘어서까지 책을 읽고 이제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윤이가 깼다. 자기도 내려가겠다고 몸부림치는 걸 서둘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억울한 울음이었다. 자기도 옷 다 껴입고 놀러 나왔는데, 왜 나는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하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시윤이랑 더 놀 시간은 없고.
"소윤아. 소윤이가 유모차 타고 갈래?"
"그럼 시윤이는여?"
"어. 아빠가 안고 가게"
"왜여?"
"아니. 시윤이는 기껏 밖에 나왔는데 깨자마자 들어가야 하니까 미안하잖아. 그래서 아빠가 안고라도 바람 좀 쐬게 해주려고"
"그래여"
한 팔로 시윤이를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16kg이 넘은 소윤이가 앉은, 주행 안정성이라는 게 거의 없는 가까운 휴대용 유모차를 끄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역시 예상보다 힘들었다. 진심으로 팔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중간에 시윤이한테 내려서 걸으려냐고 사정하듯 물었지만, 세차게 고개를 휘저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흐아. 흐아. 소휸하. 흐하. 흐하. 하빠하 너허무 힘들타"
추운데 더웠다. 분명 추운 것도 맞는데 덥기도 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나마 시윤이는 잠깐 걷는 동안에 좋아하는 차도 많이 보고, 바람도 좀 맞고 그러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시윤아. 아빠 너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다.
소윤이가 점심으로 계란밥을 먹고 싶다길래, 아침에 굽고 남은 소고기와 야채를 함께 넣어서 고품질 계란볶음밥을 만들어줬다. 소윤이는 꾸역꾸역 다 먹었고, 시윤이는 잘 먹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시윤이를 기다려 줄 수가 없었다. 먹다 남은 건 보온병에 넣어서 싸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집에 남고 나랑 아이들만 부모교육 장소로 출발했다. 시간은 없는데, 졸려서 그런가 매사에 밍기적 거리고 비협조적인 소윤이를 향해, 현관 앞에서 한 번 버력 했다. 차에 타서 사과했다.
"소윤아. 아빠가 화내서 속상했어?"
"응"
"미안. 아빠가 화내고 짜증 낸 건 아빠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네"
"진짜 미안해. 아무리 소윤이가 잘못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아빠가 잘못했어"
"이제 괜찮아여"
부모교육 함께 듣는 분들은 그동안 네댓 차례 함께 들었을 뿐, 그 외의 교제나 관계가 전혀 없다. 서먹서먹한 관계다. 소윤이도 마찬가지일 거고. 대신 소윤이는 6살 언니 한 명이 있어서 함께 놀기는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소윤이는 여기만 오면 유독 말을 듣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집에서는 참고 있던, 본인의 악한 모습을 마음껏 드러낸다고나 할까. 그게 굉장히 거슬린다. 차라리 친하고, 막역한 사이라면 우리 아이의 어떤 모습이든 감출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오히려 솔직해질 텐데, 자리가 그래서인지 소윤이의 안 좋은 모습이 보이는 게 (나 스스로) 내심 싫은가 보다. 더 안하무인이고, 통제불능이고, 욕심쟁이인 소윤이의 모습을 보며 신경이 곤두섰다. 가뜩이나 아내 없이 와서 정신도 없어 죽겠는데. 부모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윤이를 잘 타일렀다. 대답은 잘한다. 대답은 잘 하지만, 뭔가 튕겨져 나오는 느낌이다. 하아.
원래 저녁에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로 했는데, 시간도 늦고 번거로워서 일단 내일 아침으로 미루자고 양해를 구했다. 강소윤 님에게. 점심도 늦게 먹어서 저녁은 잘 안 먹을 것 같길래, 떡국떡을 구워서 먹자고 했다. 소윤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원래는 설탕이라도 뿌려서 달달하게 구워주려고 했는데, 막상 하려니 그것도 귀찮아서 그냥 맨 떡을 구워줬다. 그게 뭐가 맛있다고 소윤이랑 시윤이 모두 정신없이 집어 먹었다.
이때쯤 난 약간 방전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 같다. 휴대폰으로 치자면 배터리 잔량이 20% 미만으로 떨어져서, 절전모드로 돌입하는 그런 상태. 떡국떡을 다 먹은 애들을 재우려고 준비했다. 마침 (내) 엄마한테 영상통화가 와서, 뭔가 재우려는 준비도 지지부진하고, 지치기도 했고. 아내도 집에서 쉬고 있었지만, 예민해져 가는 나를 보며 편치 않았고. 결국 내가 불씨를 담아 아내에게 내뱉은 말 한마디로 스파크가 튀었다. 아내에게 짜증 내지 말라고 쏘아붙였고,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아내는 화가 나도 그걸 밖으로 잘 발산하지 않고, 안에서 끓이는 사람이라 아내는 그대로 눈물을 훔치며 침대에 누웠다. 난 바닥에, 애들 사이에 눕고.
아내는 그대로 잠들었고, 난 애들 재우고 다시 거실에 나와서 소파에 앉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안 먹었다. 나름대로 아내를 위해 한다고 했는데, 결국 이 꼬라지가 된 게 너무 짜증 났다. 아내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내의 말과 행동은 분명 평소랑 달랐다. 물론 내가 건수 잡은 것처럼 짜증 냈다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다정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그냥 좀 애교 가득한 반응으로 날 다독여주며 넘어가지 못하고, 맞짜증으로 일관하는 아내에게도 막 짜증이 났다. 계속 짜증이 났다. 잘한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따위 상황이 전개된 게 제일 짜증 났다.
아내가 잠에서 깼는지 밖으로 나왔다. 물론 우리는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이것저것 하던 아내는 잠시 후 첫마디를 꺼냈다.
"자러 들어갈 게"
"여보. 잠깐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짜증이 가득했지만, 의무감에 아내를 불러 세웠다. 지금 한걸음이라도 진전시켜놔야, 내일 그만큼 원상복구가 빨라지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건넸다.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고, 아내는 자러 들어갔다.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나도 답장을 했다. 물론 여전히 짜증 나고 화가 난 상태였다. 그 대상이 꼭 아내는 아니었다. 그냥 이 상황 자체, 나 자신. 종합적이면서도 추상적이었다.
다시 한번 아내에게 카톡으로 사과를 했다. 물론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진심으로, 뜨거운 심장에서 우러나온 그런 사과는 당연히 아니었다. 어차피 장기전으로 갔던 적은 없으니, 당장 내일이라도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는 편이 나으니까.
다음부터는 분에 맞게 독박을 자처해야겠다. 괜히 깜냥도 안 되면서 설쳤다가 이 사단을 냈다. 여전히 짜증이 난다. 어쨌든 하루 종일 정말 열심히, 한 몸 바쳐 육아와 집안일에 힘썼는데, 다 무용지물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