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칫국 마시다 보면

22.03.09(수)

by 어깨아빠

오전에 소윤이를 데리고 투표를 하러 갔다. 수두가 성인에게는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는 해도 어쨌든 사람이 많은 곳이니 시윤이는 데리고 가기 어려웠다. 그게 아니었다면 온 가족이 한꺼번에 갔을 텐데, 일단 내가 먼저 소윤이와 함께 나왔다. 서윤이는 자기도 가겠다면서 먼저 현관에 나가 내복 바람으로 신발을 신고 그랬다. 언니와 아빠만 갔다 온다는 소리에 입을 쩌억 벌리고 서럽게 울었다.


“서윤아. 아빠가 선물 사 올게. 금방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으아아아아아앙”


그저께 K의 아이들과 놀았던 초등학교가 투표 장소였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소윤이에게 얘기했다.


“와, 소윤아. 여기 운동장 오니까 또 00이 생각난다. 그치?”

“그러게. 00이 보고 싶다. 아빠 이제 산책도 못하겠어여”

“왜?”

“산책하면 00이 생각나니까”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오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이거 뭔지 알아여?”

“이게 뭐야?”

“이거 저랑 00이가 뽑아서 여기 놔둔 거에여. 이거 보니까 또 00이 생각난다”

“아, 그랬어?”


서윤이 선물을 뭘 살까 고민하다가 소보로 빵을 샀다. 서윤이는 내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내 손에 들린 빵을 가리키며 자기 선물이냐고 물어봤다. 서윤이에게 빵을 건네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가볍게 생각하고 안 사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서윤이도 완연한 인격체라 신뢰를 잘 쌓아야 한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찰흙을 가지고 놀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아내는 서윤이를 핑계 삼아 찰흙 꺼내 주는 걸 되도록 피했다. 아내여서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내가 혼자였으면 똑같이 했을 거다. 이제 서윤이가 무작정 입으로 넣지는 않기 때문에 꼭 서윤이가 자지 않더라도 함께 하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오늘은 나도 있었고.


서윤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서로 주고받는 말과 행동의 태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사실 아침부터 좀 그랬다. 존중이 없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이유 없이 틱틱거렸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라고 했거늘, 두어 번 얘기했는데도 서로를 향하는 불친절과 무시의 태도가 그대로였다. 두어 번의 마지막은 둘을 불러 세우고 엄하게 얘기했지만 얼마 못 가서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매개는 찰흙이었다. 나는 통화를 하고 있었고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훈육하고 있었다. 잠시 통화를 멈추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그거 찰흙통 전부 갖다 버리세요”


사전에 이미 경고된 바 있는 조치였다. 차라리 둘이 의견이 다르거나 감정이 충돌해서 다투는 건 오히려 괜찮다. 시종일관 습관처럼 비아냥과 짜증을 입술에 붙이고 상대를 향해 내뱉는 말들은 두고 보기가 어렵다.


이렇게 잠시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서윤이가 나섰다. 눈치는 빨라 가지고 뭔가 차가운 기운이 흐른다 싶으면 아빠와 언니, 오빠에게 번갈아 가며 애교를 부렸다. 심지어는 자기가 잘못해서 혼나야 할 때도 웃음과 애교로 선제공격을 했다. 아내와 나는 대체로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편이다. 막내가 너무 예뻐서 훈육을 못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윤이는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막내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내는 하마터면 투표를 못 할 뻔했다. 느긋하게 마감 시간 전에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넘길 뻔했다. 아내가 투표하러 갈 때 다 함께 나와서 카페와 빵 가게에 들렀다. 장도 보고. 원래 아내도 가야 했던 엄마 선생님들의 모임을 마치고, 선생님 두 분이 우리 아파트로 오셨다(그중 한 분은 우리와 같은 동에 사신다). 아내와 아이들은 잠시 주차장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난 서둘러 집으로 올라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저녁으로 먹을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다. 언제나 환영받는 음식이다. 특히 소윤이에게.


소윤이가 밥을 먹다 얘기했다.


“엄마. 근데 나중에 좀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져?”

“뭐가?”

“아니. 00이랑 00이 오빠 둘 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여?”

“아, 그건 아직 너무 먼 이야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러면 어떻게 하냐 이 말이져”

“그러게. 글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소윤이 말고도 다른 여자 친구들이 많을 텐데?”


차마 소윤이에게 표현은 못 했지만, 김칫국을 이렇게 시원하게 마시다니. 아니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고 사랑은 김칫국 먼저 마시는 자의 것일지도 모르지. 낮에 00이(어제 떠난) 얘기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거기까지 생각이 발전했나 보다. 나중에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냐면서, 지금은 이모나 삼촌으로 부르는데 그럼 나중에 호칭도 바꿔야 하냐는 얘기까지 했다. 시윤이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엄마. 그럼 저는 누구랑 할까여?”


그래, 뭐. 어차피 할 거라면 빨리하는 것도 좋고 생판 모르는 놈 데리고 오는 것보다는 잘 아는 사람도 괜찮지. 이래서 옛 어른들이 정략결혼을 시킨 건가. 그래도 결혼 생각을 하는 거 보면 엄마, 아빠 사는 게 행복해 보이긴 했나 보다. 다행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