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9(토)
눈을 떴는데 엄청 조용했다. 방 문은 닫혀 있었고 거실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간 거라고 생각했다. 얼른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계를 봤는데 일곱 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니 서윤이와 아내도 여전히 방에서 자고 있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건 소윤이와 시윤이의 소리였다. 잠결이었지만 둘의 소리에서 웃음과 유쾌함이 잔뜩 느껴졌다.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9시 30분이었다. 아내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서윤이는 언제 깼는지는 모르지만 언니, 오빠와 함께 놀고 있었다. 중간에 서윤이가 막 짜증을 내면서 우는 소리도 들리긴 했는데 심하지는 않았다. 보통은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가만히 두지를 않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런 것도 없이 아내와 나에게 늦잠을 허락했다.
“소윤아, 시윤아. 배 안 고파?”
“고파여”
10시 30분이 다 되어서야 아침을 차려서 줬다. 이 시간에 아침을 주면, 말 그대로 ‘돌아서면 점심 먹을 때’가 되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다.
아침을 먹고 바로 예배를 드렸다. 날씨만 좋았으면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밖으로 나갔을 텐데 안타깝게도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그것도 하루 종일. 소윤이가 어제
“아빠. 내일 인라인 탈 수 있어여?”
라고 물어봤다. 소윤이가 말하기 전부터 나도 ‘인라인스케이트 타러 한 번 나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기 예보를 말해 주며 ‘아마 힘들 거’라고 대답해 줬다. 어디 가까운 곳(이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에 바람이라도 쐬러 가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오늘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좋겠다”
라고 얘기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어디 한적한 바닷가 같은 곳에 가서 잠시 비가 멈추면 내려서 걷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바다 풍경을 보는’ 모습이었다. 그런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 아내도 마찬가지였고. 어영부영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에 있었다고 기분이 처지거나 우울한 건 아니었다. 여유(?)를 즐기며 잘 보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윤이가 낮잠을 자러 들어간 틈을 타서 레고를 했다. 지난주에 해체만 했던 레고를 꺼냈다. 시윤이도 처음에는 소윤이와 함께 앉아서 의욕을 보이더니 이내 흥미를 잃었다. 시윤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수준이었다. 시윤이에게는 따로 상을 펴 주고 설명서가 필요 없는, 이것저것 뒤섞인 레고 상자를 꺼내줬다.
“소윤아. 안 힘들어?”
“네, 재밌어여”
소윤이는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조금씩 모양을 갖추며 조립을 했다. 나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소윤이 혼자 하는 레고였다. 잘못 조립해서 다시 부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배움이자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윤이를 재우고 나온 아내가 소윤이 앞에 앉아 소윤이의 레고 조립을 감리했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 잘못 끼운 게 있었다. 아내가 소윤이를 도와줬다.
점심은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밥을 하기는 했는데 반찬은 없고(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반찬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있는 반찬 넣고 비비기로 했다. 콩자반, 멸치볶음, 깻잎무침, 김 등을 넣어서 아이들 비빔밥을 만들어 주고 아내와 나는 거기에 고추장과 김치를 더했다. 볶음밥보다 더 간편한 게 비빔밥이다. 볶는 과정조차 비비는 것으로 바꿨으니.
오후에도 계속 비가 내렸다. 장도 보고 커피도 사기 위해 잠시 나갔다 왔다. 집에 돌아올 때는 비가 잠시 멈췄길래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물어봤다. 아, 먼저 아내에게 슬쩍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가면 되나?”
“어. 왜?”
“아니. 애들이 바로 들어가면 아쉬워할 거 같아서. 잠깐 동네라도 걸을까 싶어서”
“그래?”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물어봤다.
“소윤아, 시윤아. 바로 집으로 가도 괜찮아?”
“집으로 안 가면여?”
“아, 그냥 잠깐 동네라도 걸을까 했지”
“음, 괜찮아여. 그냥 집으로 가자여”
소윤이는 요즘 이럴 때가 많다. 집에 있을 때는 나가는 걸 귀찮아하거나 밖에 있을 때는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하거나. ‘동네 산책’ 정도로는 소윤이의 구미가 당기기 어려운 날이 많아지고 있다.
늦은 오후나 저녁 식사 직전의 시간에 너무 졸리다. 평일이나 주말이나 비슷하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비슷한 시간에 피곤이 해일처럼 몰려온다. 아내가 아이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졸았다. 처음에는 졸았는데 나중에는 일부러 고개를 뒤로 젖히고 쪽잠을 잤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약간이라도 피곤을 몰아낼 것 같았다. 예상대로 잠깐의 쪽잠이 거대한 피로의 파도를 좀 물리쳤다. 평일에 회사에서도 이런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수면실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 졸릴 때는 잠시 의자를 젖히고 기대서 눈을 붙일 시간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내내 조느니 굵게 20분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내일 토요일이라 너무 좋아여. 아빠가 집에 있어서”
라고 말했던 소윤이에게 괜히 미안할 정도로 평이한 토요일이었다. 이런 날도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을 거다. 오히려 주말마다 너무 바쁘게 보내면, 설령 그게 가족끼리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허해질 때가 있다. 약간은 무료하고 지루한 듯, 집에서 보내는 시간 안에서 쌓는 대화와 교감의 열매가 더 값질 때도 많다. 아까 오후의 언젠가, 나와 소윤이가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묘한 쾌감을 느꼈다. 같은 책을 읽고 나눔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도 들었고.
작은 아씨들’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던 소윤이가 오늘은 ‘로빈슨 크루소’를 집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소윤이에게도 계속 추천했는데, 오늘 그걸 읽기 시작했다.
“소윤아. 어때? 재밌지 않아?”
“네, 재밌어여”
약간 인사치레에 가깝게 답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앉은 자리에서 수십 페이지를 읽는 걸 보면 읽을만했나 보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는 어제부터 별렀던 치킨을 먹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했다. 소윤이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에게
“엄마하. 푸라닭 먹게여허?”
라며 물었다고 했다. 함께 책 나눔을 할 정도가 되면 아마 치킨도 겸상을 해야 할 거다. 지금처럼 아내와 단둘이 보내는 밤 시간이 그리워지는 날도 올 거다.
아내는 치킨을 먹으면서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빵 중독이었는지를 고백, 아니 간증했다. 빵을 먹지 않은 며칠 동안 생각보다 빵 생각이나 욕구가 없었다면서.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먹을 때도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습관적으로 먹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맛있지는 않았다’라는 부분에는 사실 동의하기 어려웠다. 아내가 아몬드 크로와상을 처음 베어 물 때의 그 모습은 ‘맛있지 않고서는’ 보여주기 어려운 자태였으니까. 아내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설령 기억의 왜곡과 조작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아내는 지금, 빵에서 해방되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