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첫째와 둘째가 부리고 꿀은 막내가

22.04.10(주일)

by 어깨아빠

아내와 내가 아직 이불을 걷어내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을 때 소윤이가 아내에게 와서 얘기했다.


“엄마. 우리가 빨래 다 갰어여”

“어? 빨래? 빨래 갤 거 없을 텐데. 엄마가 안 꺼내 놨는데”

“건조기에 있는 거 꺼내서 갰어여”

“어? 건조기에 있는 거?”

“네”

“진짜? 어떻게?”

“그냥 옮겨서 했져”

“갠 건 다 어디 갔어?”

“다 넣어 놨어여”

“어? 정말?”


잠결에 들리는 소윤이의 목소리에 기쁨과 즐거움, 기대, 뿌듯함 같은 게 모두 담겨 있었다.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건조기에 있는 빨래더미를 거실에 옮겨 놓고 일일이 갠 것도 엄청났지만, 그걸 자기 자리에 맞게 넣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없는 수납공간 안에서 자리를 마련해야 해서 아내도 힘겨워 하는 일이고, 나는 아예 하지도 못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기특했지만, 생각한 대로 실천해서 실제로 도움이 될 만큼 해냈다는 것도 대단했다. 소윤이는 나중에 아내에게 몰래 와서 귓속말을 했다고 했다.


“엄마. 근데 시윤이는 손수건만 갰어여. 서윤이는 하도 방해하려고 해서 손수건 개라고 줬고”


난 여덟 살 때,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나 있었을까 싶다.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소윤이는 어린이 부서 온라인 예배를 따로 드리고 싶어 했지만 다 함께 어른 예배를 드렸다. 예배 드리기 전에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혔는데 긴팔 옷을 입기에는 날이 조금 더웠다. 급히 여름 옷을 꺼내서 입혔는데 세 녀석 모두 옷이 작고 짧았다. 계절의 변화하는 최절정기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것도 아쉬웠고, 어느새 또 자녀들이 그만큼 큰 것도 아쉬웠다.


아내는 무척 졸려 보였다. 예배를 마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아내는 소파에 앉아 목을 뒤로 젖힌 채 자고 있었다.


“여보. 서윤이랑 들어가서 좀 자”


아내는 어젯밤부터 다시 기침이 심해졌다. 난 어제까지 남아 있던 ‘기력 없음’의 증상도 사라져서 거의 정상에 가까웠다. 아내는 서윤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난 아침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다. 점심을 먹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라 이런저런 군것질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함께 제공을 하면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오늘은 자석 블록을 꺼내 달라고 해서 꺼내 주고 난 책을 펼쳤다. 한 시간 넘게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두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했다. 아까 아내가 앉아서 자던 그 모습 그대로 졸았 아니 잤다. 아내보다 서윤이가 먼저 깨서 나왔다. 아내는 조금 더 자다 깼는데 쉽게 잠을 떨쳐내지 못했다. 기침을 많이 해서 힘들다고 했다.


점심은 장모님께서 배달을 시켜 주셨다. 점심에는 뭘 해서 먹여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점심 고민을 중단할 수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없었다. 장모님께서 시켜 주신 칼국수를 어떤 심미적 감흥도 없이 그저 위를 채우는 일에 집중하며 먹었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소윤이의 상태가 조금 심상치 않았다. 막 아프거나 열이 나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피곤하다고 했다. 자꾸 누워 있으려고 하고, 무엇보다 먹는 양이 확 줄었다. 소윤이는 몸이 안 좋으면 일단 먹는 게 줄어든다. 확 처져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자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정상에서 약간 밑에 있는 느낌이랄까. 소윤이도 ‘졸리고 피곤하긴 한데 아픈 건 아니라’고 했다.


소윤이는 엄마도 찾았다. 엄마야 늘 찾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엄마, 안아주세여’라는 표현을 많이 했다. 아내는 소윤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걸 하고 있던 시윤이와 서윤이도 곧장 따라 들어갔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방으로 가서 시윤이와 서윤이는 나오라고 했다.


“아빠. 왜여? 왜 누나만 있어여?”

“누나가 좀 몸이 안 좋대. 엄마랑 있고 싶대. 시윤이가 오늘은 좀 양보해 줘”


속상하냐고 물어보니까 웃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속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소윤이에게 아내를 온전히 주고 싶었다. 내가 없는 평일에는 소윤이가 그런 말을 하는 일도 잘 없거니와 설령 그런다고 해도 시윤이와 서윤이가 오늘처럼 순순히 누나에게 양보하지도 않을 거다. 시윤이는 계속 자석 블록을 하면서 놀았고 서윤이는 계속 책을 가지고 왔다.


“아빠아. 이거 이거주데여어”


책 두세 권을 돌려 가면서 계속 가지고 왔다. 자녀, 특히 어린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정말 힘든 건 ‘반복’이다. 그게 놀이든, 장난감이든, 책이든 끝을 모르고 ‘또’를 외치는 그때가 참 힘들다. 책이 끝나니까 이번엔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들고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아빠아. 더니 그여 두데여어”

“자, 여기 서윤이”

“아빠아. 엄마두우”

“자, 엄마”

“언니두우”

“소윤이 언니도 있네”

“오빠두우”

“오빠도 여기 있네”

“아빠두우”

“아빠도 그렸다”

“아빠아. 더니 또 그여두데여”

“또? 이제 서윤이가 그려 봐”

“아아아아. 더니 그여두데여어”

“그래. 자, 여기 서윤이”

“엄마두우”

“엄마 아까 그렸잖아”

“또 그여두데여어”


그림이라도 잘 그리면 재능 낭비하며 즐거움이라도 찾을 텐데 그리면 그릴수록 자괴감이 드는 그림을 계속 그렸다.


아내와 함께 들어간 소윤이는 살짝 잠들었다가 깨고 그랬다. 뭔가 몸이 안 좋은 건 분명했다. 그 정도가 심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같이 들어간 아내도 푹 자고 나왔다. 오늘은 아내가 신생아처럼 많이 잤다. 그래도 시윤이와 서윤이가 엄마를 찾지 않고 잘 놀았다.


아이들 저녁으로는 토스트를 만들어 줬다. 아이들도 뭔가 지겨울까 봐 나름대로 색다른 음식을 해 주려고 평소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 봤는데, 망했다. 여차여차해서 토스트의 모양을 갖춰 내긴 했지만 상상했던 그림은 전혀 아니었다. 나의 처음 상상을 모르는 세 남매는 맛있다면서 잘 먹었다. 소윤이는 이때도 딱 한 쪽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와 내가 먹을 걸 정하지 못했다. 배달을 시켜 먹을까, 라면을 끓여 먹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초간단 김,밥을 먹기로 했다. 그나마 김도 큰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잘 찢어지는 김밖에 없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고 나서 김에 밥을 얹고 남은 김치찌개의 김치, 참치, 숙주나물을 넣어서 말았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대접하면 욕먹을지도 모르는 모습의 김밥이 됐지만, 맛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난 먼저 먹고 아내는 한참 있다 나와서 먹었다. 예전에 2주씩 격리했을 때는 얼마나 고생스럽고 지겨웠을까 싶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붙어 있는 게 며칠 지속되다 보니, 역시나 감정의 여과가 덜 되는 느낌이다. 그리움에 사무쳐서 만나는 출퇴근의 삶을 살 때에 비하면 정제하지 않고 나가는 말과 행동이 아무래도 많아졌다. 다만 이것도 대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모양이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나를 바라본 아내의 말에 의하면


“여보. 서윤이 볼 때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말도 그렇고. 물론 소윤이랑 시윤이한테는 싫은 소리 해야 할 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온도 차이가”


뜨끔했다. 내일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꿀을 좀 묻혀야겠다. 마음은 꿀인데 오해할라.


(충격적이게도 아이들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시윤이가 만든 자석블록의 조형물 사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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