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6(토)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온 가족을 깨웠다. 소윤이는 잠드는 것도 잘 이겨내는데 일어나는 것도 지체가 없다. 신기하다. 그 이른 시간에 일어나라고 깨우는데 마치 십수 년 직장 생활을 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고 시윤이와 서윤이가 짜증을 내고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수월하게 일어났다. 아내가 제일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점심에는 소윤이가 좋아하는 월남쌈을 먹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소윤이에게 어제 깨우지 않은 걸 사과했다. 사과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어쨌든 소윤이를 생각해서 한 일인데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교회에 가서는 오늘 점심으로 월남쌈을 먹을 거라는 얘기도 했다. 아빠 때문에 하루를 빠지긴 했지만, 정상참작을 해서 ‘개근’으로 간주하고 개근 선물을 준다는 명분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서 빵 가게에 들렀다. 그 시간에도 문을 연 빵집이 있었다. 소윤이가 좋아하는 빵 하나, 시윤이가 좋아하는 빵 하나, 서윤이가 좋아하는 빵 하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빵도 하나 골랐다가 뺐다. 대신 아내가 빵을 골랐다. 내가 사겠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평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이 아니라면서 잘 가지도 않는 빵집에서 ‘비싼’ 롤케이크를 골랐다.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생도너츠는 다시 가져다 놨다.
아이들은 우유를 데워서 주고 아내와 나는 커피를 내렸다. 밥 대신 빵 먹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하루의 첫 끼로 피해야 하는 음식의 최고봉이 빵이라는 기사를 봤다. ‘혈당 스트라이크’를 유발한다면서. 아무리 혈당이 높게 치솟는다고 해도 오늘은 빵과 커피가 어울리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움직였으니 밥하는데 쓰는 체력이라도 좀 줄여야 했다. 캡슐 두 개로 내린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
엄청 많은 일을 한 것 같았는데 아직 여덟 시였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서, 해부학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치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고 있었다. 앉아 있었다 뿐이지 사실상 쓰러진 느낌이었다. 일단 설거지를 했다. 어제의 설거지가 약간 누적되어서 양이 조금 많긴 했지만 가뿐하게 소화 가능한 수준이었다. 자녀들도 엄마와 아빠에게 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시간을 잘 보냈다. 사실 그럴 때가 많긴 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다투기도 하지만.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는 화장실 청소를 했다.
어제였는지 며칠 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내가 아이들을 씻기러 들어갔다가
“아, 변기가 왜 이렇게 더럽냐”
면서 샤워기로 물을 뿌리며 맨발로 변기를 문지르는 장면과 소리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아내에게 나를 향해 내색하거나 압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나도 뭔가 부담을 느껴서 그런 게 아니라 기왕 일찍 일어나서 시간이 많고 별일이 없으니 ‘할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내는 여전히 해부학적 최대 각도로 고개를 젖히고 자고 있었다. 내 운동화도 하나 가지고 들어가서 빨았다. 아내의 기준에는 성에 차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는 정성껏 청소를 했다.
아내와 소윤이는 성경 필사를 했다. 소윤이는 처치홈스쿨에서 하는 필사가 따로 있고, 매일 그걸 최우선으로 꾸준히 한다. 교회 어린이 부서에서 주는 필사가 따로 있는데 그걸 안 했나 보다. 많이 밀렸다고 했다. 매일 필사를 하고 있으니 그건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소윤이는 그것도 완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는지 식탁에 앉아 필사 책을 펼쳤다. 아내의 관찰 결과에 따르면, 소윤이는 정한 목표나 과제를 수행하는 것에 굉장히 열심을 내고 이루지 못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경향이 있다. 오늘도 엄청 힘들어하고 버거워 하면서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옆에 앉았다.
“소윤아. 엄마도 같이 옆에서 필사할 테니까 힘내”
서윤이는 자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만큼 이른 낮잠을 재웠다. 낮에는 아빠와 들어가서 자는 걸 조금도 거절하지 않는다. 오늘도 흔쾌히 내 손을 잡고 들어가서 바로 눈을 감았다. 사랑의 밀담을 나누고.
“서윤아. 아빠가 많이 사랑해”
“아빠아. 더두 다랑해여어”
“그래. 서윤이 많이 좋아해”
“아빠아. 더두 아빠 주아해여어”
누나와 엄마가 모두 식탁에 앉아 필사를 하니 시윤이도 자꾸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시윤이도 뭐 할 일(영어 공부, 성경 읽기 등) 가지고 와서 해’라고 얘기하니, 그건 싫고 그냥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시윤이 말대로 그냥 ‘구경’만 하면 괜찮겠지만, 시윤이의 구경은 언제나 참견과 방해로 이어질 때가 많다. 의도가 담기지 않을 때도 있고 의도가 다분할 때도 있고.
“시윤아. 아빠한테 와”
스킨십을 싫어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별로 싫어하지 않는 시윤이를 품에 안고 놀았다. 도망가는 시윤이를 잡아서 간지럼 태우고, 다시 풀어줬다가 잡아서 간지럼 태우고를 반복했다. 시윤이가 이를 드러내고 진짜 웃음을 보이면, 그건 시윤이가 좋아하는 거다. 말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꾸 내 옆으로 슬금슬금 오는 걸 봐도 그렇다. 시윤이와 둘이 앉아서 보드게임도 한참 했다.
서윤이는, 딱 나가야 할 시간에 알아서 깼다. 잠을 푹 못 잤는지 처음에는 짜증을 좀 냈는데 기저귀 갈기와 옷 갈아입기로 몰아쳤더니 자기도 모르게 잊은 듯했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완전히 정상이었다.
오늘도 월남쌈과 쌀국수는 만족스러웠다. 실패가 없는 곳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돈까스도 시켰는데 덕분에 우리의 식사가 다소 수월해졌다. 서윤이에게 돈까스를 먹인 덕분에 서윤이에게 분산되는 관심과 체력의 소모를 줄였다. 돈까스에 질리고 나서는 라이스페이퍼를 끊임없이 요구하긴 했다.
“여보. 그래도 오늘은 서윤이가 초반에 잘 먹어줬잖아. 그걸로 고마워해야지”
맞는 말이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뒤에는 시윤이 성경책을 사러 갔다. 시윤이의 글 읽는 실력이 일취월장을 했고, 아내와 의논하고 이제 성경책을 사 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 가서 성경책을 사 주기로 했다. 온라인 주문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시대지만, 직접 매장에 가서 고르고 선물 받는 기쁨까지 대체하지는 못한다. 시윤이도 무척 졸렸다. 서점까지 가는 길에 아주 잠깐 눈을 붙였다.
정작 시윤이는 성경책 고르는 것에 큰 관심과 감흥이 없었다. 소윤이와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소윤이였으면 아주 세심하게 색깔부터 골랐을 거다. 아내가 이것저것 살펴보고 골랐다. 난 서윤이를 맡았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서윤이와 날이 갈수록 노화를 거듭하는 나의 몸이 시너지 효과를 내서, 서윤이를 안고 있는 게 무척 버거웠다. 내려놓으면 또 호기심을 가득 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통에 만만하지 않았다. 서윤이는 복을 받았다. 이렇게 힘들게 해도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붙어 있는 서윤이가 고맙기도 했다.
소윤이는 아침부터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오늘은 시간상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내일은 꼭 타자’는 약속을 하고 ‘오늘의 욕구’를 잠재웠다. 소윤이도 기쁘게 받았다. 다만 날씨가 정말 좋았다. 잠깐이라도 바깥바람을 쐬지 않으면 억울할 정도로 좋았다. 성경책을 사서 집으로 왔지만,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렌지를 사러 걸어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킥보드를 탔고, 서윤이는 유모차를 탔다. 서윤이가 언니와 오빠를 가리키며 자기도 킥보드를 타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서윤이는 아쉬운 티만 내고 막 짜증 내거나 울지는 않았다.
놀이터에도 들렀다. 서윤이가 제일 신나게 놀았다. 가만히 뒀으면 미끄럼틀을 무한으로 반복해서 탈 것 같았다. 소윤이는 이제 놀이터가 시시하다고 했다. 누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시윤이는, 누나가 시시해 하니 자기도 엄청 흥을 내지는 못했다. 소윤이는 ‘그래도 집에 바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밖에서 노는 게 낫다’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놀고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서는 아까 화장실 청소할 때 세제에 담가놨던 운동화를 빨았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아이들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먹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리 준비했다. 냉동실에 있던 비상용 밥을 털어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부지런히 만들었다. 주먹밥을 만들고 나서 아이들을 씻겨 놓을 생각도 했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주먹밥을 모두 만들어 놓고 난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나왔다. 축구를 하러 가야 했다. 그래서 서둘렀다. 최대한 많은 걸 해 놓고 나가려고.
“얘들아. 아빠 갈게”
“아빠. 안녕”
아내가 해야 할 일은 주먹밥을 입에 하나씩 넣어주는 일과 씻기는 일이었다. 아, 같이 들어가서 재우는 일까지.
축구를 마치고 휴대폰을 보니 아내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과자 원합니다. 썬칩, 포카칩, 그다음 달달한 것도 아무거나 하나”
“수신완료”
마트에 들러서 아내가 보낸 과자를 사고 마틸다(레몬맛 음료수)도 하나 샀다. 아내가 얼마 전에 이 음료수가 먹고 싶다고 혼잣말인 듯 지나가는 말인 듯 얘기했었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엄청 피곤해 보였다. 졸았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고 애들 재우러 들어갔다가 좀 자다 나와서 그렇다고 했다. 아내에게 음료수를 꺼내서 보여줬다. 작은 일이도 큰 반응을 보여주기로 유명한 아내는, 오늘도 반갑게 화답했다.
“여보. 안 그래도 아까 마트 갔을 때 이거 살까 말까 엄청 고민했거든”
“여보. 좋겠네”
“뭐가?”
“나처럼 센스 있는 남편이랑 살아서”
“그러게?”
상을 펴고 아내와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보내는 수다의 밤이, 유독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오늘도 우리 막내가 기꺼이 깨서 엄마와 아빠의 오붓한 시간에 마침표를 찍어 주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