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3(토)
시윤이의 날이었다. 곧 다가올 생일을 기념해 양쪽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 함께 만나기로 했다. 작년에는 누나와 동생의 생일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에 생일을 맞이하느라 엄청 기다렸는데 올해는 아주 담담했다.
정확히 딱 점심시간에 식당을 예약했다. 아침 시간이 매우 분주할 거라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 분주함을 조금이나마 감소시키고, 아침과 점심의 간격이 너무 좁으니 아침을 너무 배불리 먹이지 않기 위해서 아침은 과일로 대체했다.
아이들 때문에 바쁜 것보다 우리 집의 상황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어제 미룬 설거지를 비롯해서 소파에 쌓인 옷, 뭔가 너저분하고 어수선한 여기저기를 정돈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사실 나보다는 아내가 더 강하게 느꼈다. 게다가 어젯밤부터 허리가 너무 아파서 뭔가 집안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계속 소파에 앉아서 요양 아닌 요양을 했다.
자동차 전구를 갈아야 했는데 직접 가는 게 너무 귀찮았다. 허리도 안 좋고. 카센터에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소윤이도 시윤이 선물을 사야 한다고 해서 소윤이도 데리고 나왔다. 소윤이와 둘이 나온 게 은근히 오랜만이었다. 그새 느낌이 또 달라졌다. ‘아이’와 함께하는 느낌은 거의 없고 ‘어린 사람’과 동행하는 기분이었다. 소윤이는 엄청 수다스럽지 않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침묵이 흐르기도 했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아무튼 엄청 편안했다. 이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고, 관계의 퇴보를 막기 위해 애써 가식을 떨 필요도 없었다.
“아빠. 아빠랑 데이트 한 지 엄청 오래 됐네?”
“그러게. 진짜 오래 됐다”
“아빠랑 오랜만에 데이트하니까 좋다”
“이게 무슨 데이트야”
“그래도. 아빠랑 둘이 이렇게 가니까 좋다구여. 데이트까지는 아니라도”
“그러게. 또 데이트해야 되는데”
소윤이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을 거다.
전구는 금방 갈았다. 소윤이는 볼 때마다 신기한지 등을 교체하는 사장님 옆에 딱 붙어서 지켜봤다. 그 모습을 보니 시윤이 생각이 났다. 시윤이도 그런 걸 엄청 좋아한다. 시윤이는 주인공인 만큼 집에서 차분히 준비를 했다. 누나가 자기 선물 사는 건데 당사자가 따라오는 것도 이상하고.
소윤이는 자기 용돈으로 시윤이의 선물을 샀다. ‘장난감은 불가’인 상황에서 소윤이가 살 수 있는 품목은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소윤이는 스티커를 샀다. 세 장의 스티커를 사는데 한참 동안 고민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아내가 떠오른다. 누가 봐도 아내 딸이다. 소윤이는 나름대로 시윤이를 엄청 생각해서 골랐다. 이번 주에 처치홈스쿨에서 부활절 계란을 받았는데 거기 병아리 스티커가 붙어 있었나 보다. 소윤이는 시윤이가 그걸 엄청 귀여워했다면서 비슷한 모양의 병아리 스티커를 골랐다. 소윤이는 자기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를 꺼내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돌려받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다 돼서 바로 나가야 했다. 아내는 그 사이 시윤이와 서윤이를 씻기고, 마음의 평안을 빼앗았던 여러 할 일까지 모두 끝냈다.
“하아. 여보.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 마음이 좀 후련하네”
비록 시윤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양쪽 할머니를 모두 만나는 건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작년 시윤이 생일에 다 함께 모여서 식사하고 1년 만에 만나는 거였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하긴 지나간 날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이때가 벌써 그렇게 됐다고?’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서윤이도 좀 크고 나니 한결 식사의 시간이 편안해졌다. 물론 서윤이의 식사 태도에 따라서 아직은 기복이 좀 있고, 다 먹고 나면 서윤이 밑에 즐비한 밥풀떼기와 각종 음식을 치워야 하는 건 여전하다. 그래도 최고 정점의 시간은 이제 지났다.
식당에서 집까지는 차로 10분 정도 거리였다. 서윤이는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잠들고 있었다. 부모님들께 먼저 집에 들어가 계시라고 하고, 아내와 나는 서윤이를 태우고 조금 더 돌았다. 서윤이는 더 깊이 잠들었고 무사히 방에 눕히고 나왔다. 요즘은 주로 서윤이 때문에 웃고, 가장 예쁨을 많이 받는 것도 서윤이지만 막상 없으면 굉장히 한적하고 여유로운 건 사실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지난 성탄절에 장모님이 사 주신 미니 레고 자동차를 꺼내서 조립했고, 어른들은 거실 곳곳에 흩어져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윤이는 생각보다 오래 잤다. 처음 깨서 나왔을 때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나와서도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서 조금 더 잤다. 오늘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많이 피곤했나 보다. 두 번째 깨고 나서는 완전히 기분을 회복하고, 막내 서윤이 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서윤이가 깨고 나서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생일 주인공 양옆에 한 명씩 앉아서 축하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녀를 셋 낳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 수에 따른 가치 판단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을 보면 절로 흐뭇해진다. ‘저 녀석들이 앞으로 평생 저렇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평일 낮에, 아내를 힘들게 할 때 말고는 대체로 감정 표현을 아끼는 시윤이도 오늘은 얼굴에서 기분이 드러났다.
소윤이는 시윤이에게 편지도 썼다. ‘시윤이가 벌써 여섯 살이라니…’로 시작한 편지의 중간쯤에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시간은 금방 흘른다”
덕분에 다들 웃었다. 혹시나 소윤이가 오해할까 봐, 왜 웃는지 상세히 설명했는데 다행히 기분이 상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윤이도 상황의 맥락을 다 이해하는 눈치였다. 소윤이는 아까 산 선물과 그 편지 말고도 직접 만든 팝업 편지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만들고 지퍼백에 담아서 시윤이에게 줬다. 서윤이에게 하듯 마냥 받아 주고 이해해 주지는 못해도 어쨌든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동생이 시윤이인 건 분명하다. 시윤이를 향한 소윤이의 마음이 보였다.
생일 축하를 마치고도 꽤 한참 동안 함께 시간을 더 보냈다. 마지막쯤에는 내가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나처럼 졸지는 않았지만 아내도 피곤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중에 장모님이 아내에게 전화로 ‘둘 다 너무 피곤해 보여서 걱정을 했다’고 하셨다. 오늘 유독 더 피곤하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 정도 피곤함은 기본치로 깔고 가는 느낌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시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다. 사실 어제 내가 약속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각보다 늦게 가셨잖아. 덕분에 너희도 실컷 놀았고. 그러니까 목욕은 다음에”
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스스로 뭔가 찜찜했다. 아니, 당당하지 못했다. 어제의 약속에는 ‘조건’이 없었다. ‘내일’이 되면 ‘하자’는 식의 확정적 약속이었다. 그 정도 약속을 파기하려면 더 강력하게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소윤아, 시윤아. 대신 아빠는 같이 못해. 아빠는 지금 허리가 아파서 거기 앉아 있기가 힘들어”
“알았어여. 괜찮아여”
결국 아내가 함께 들어가서 앉았다. 목욕을 같이 하는 건 아니어도 화장실에 계속 앉아 있었다. 서윤이도 욕조에 넣었는데, 서윤이만 두고 나올 만한 담력이 아내에게도 나에게도 아직은 없다. 난 거실에 누워 요양을 취했다. 그나마 진통제의 효과가 좀 들었는지 통증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간단하게 먹이기로 했다. 아내가 사 놓은 조랭이떡으로 간단하게 간장 떡볶이를 만들어 줬다.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목욕을 하는 동안 내가 만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기여한 집안일이었다. 엄청 간단하게 만들었는데 다행히 소윤이와 시윤이의 찬사를 받았다.
시윤이에게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물었더니,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시윤이는 까부는 것도 집에서만 까불고, 수다스러운 것도 집에서만 수다스럽다. 막상 보면 별로 호들갑이 없어서 ‘좋은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너무 좋았나 보다. 시윤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때는 언제나 너무 신이 나여”
아직 진짜 생일은 아니니까 더 축하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을 재우고 떡볶이를 먹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사 놓은 떡과 소스가 있었다. 아내는 들어가면서
“내가 나와서 만들어 줄게”
라고 얘기했다. 아내가 금방 나오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기왕 욕조를 꺼내기도 했고 아픈 허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으면 도움이 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꽤 한참 몸을 담그고 나왔다. 아내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 주에 정말 피곤한가 보다. 벌써 며칠째 깨지 못하고 계속 잔다. 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방에 들어가서 아내를 깨웠다.
“어! 뭐야. 나 왜 안 깨웠어?”
아내는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내는 순간적으로 아침이 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행히 아직 밤이었다. 아내는 일어나서 나오자마자 떡볶이를 먹었다. 그래서였는지 다른 날에 비해 금방 잠을 떨쳐냈다. 그렇다고 뭔가 더 역동적(?)인 걸 하고 그러지는 못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휴대폰 보면서 대화를 나누다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자러 들어갔다.
“여보. 다음 주에는 일주일에 세 번 가는 거 적응되겠지?”
이번 주가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