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03(목)
밤새 소윤이가 자주 깨고 그래서 뭔가 개운치 않게 잤다. 기억에는 이른 새벽에도 소윤이가 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윤이도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꼭 알람 안 맞추고 잔 날에 이런다. 8시 45분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나의 기상을 필두로 시윤이, 소윤이, 아내가 차례대로 일어났다.
다행히 시윤이의 열은 일단 떨어졌다. 아내는 이따가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렇게 늦을 줄 알았으면, 일찍 일어나서 내가 바래다줘도 됐을 텐데.
원래 낮에 민영이(아내 아는 동생, 채연이 엄마)이 놀러 오기로 했었다. 일단 시윤이가 병원에 다녀와야 오라고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혹시나 독감 판정받으면 소윤이랑 동갑인 채연이도 위험하니까. 아내가 병원에서 전화를 했다.
"여보. 사람 너무 많아"
"아. 진짜? 다들 아파서 난리인가 보네"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많은 거 같아"
"몇 명이나 있어?"
"내 앞에 8명"
"아. 한 시간은 걸리겠네"
8명이면 별로 안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보통 병원 문 닫기 직전 시간에 많이 가서 한 명도 없을 때도 많았다. 거기에 우리가 가는 소아과 선생님은 굉장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하셔서, 한번 입이 터지시면 10분도 넘게 얘기를 하실 때도 있다. 물론 아내와 나는 이런 유형의 선생님을 선호한다. 예전에 대화동 살 때 갔던 소아과는 사람은 바글바글한데, 정작 진료는 2-3분 만에 끝나곤 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만 했다.
"열이 나니까 일단 해열제 드릴게요. 며칠 지켜보다가 안 떨어지면 또 오세요"
"귀에 염증이 좀 있네요. 항생제 먹으면 나을 거예요"
그에 비해 지금 선생님은 굉장히 정확하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또 그걸 듣기 쉽게 설명해 주신다.
아내랑 통화하는 동안 휴대폰 너머로 여기저기서 우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독감 바이러스 소굴에 들어가서 오히려 독감을 옮아 오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특히 소윤이. 그나마 소윤이는 아내 말도 잘 듣고 기분도 좋다고 했다. 시윤이도 마찬가지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일단 독감 검사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폐에서 소리가 들리고,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로 보아(독감은 열이 계속 오르고 고열이 유지된다고 하셨다) 오히려 초기 폐렴이나 모세기관지염일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윤이는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열도 정상이었다.
병원에서 집에 갈 때는 민영이가 데리러 와서 편하게 갔다고 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운동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민영이가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혹시 저녁시간까지 머물게 되면 난 미리 운동을 하고 올 생각이었다. 퇴근하면서 상황이 어떤지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갔다.
소윤이가 가장 먼저 와서 안겼다. 시윤이도 똑같이 출발하지만 주력에서 밀린다. 소윤이를 안아주고 있으면, 밑에서 시윤이가 자기도 안아 달라고 난리다. 물론 매일 이러는 건 아니지만. 소윤이를 내려놓고 시윤이도 안아 주고.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채연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내는 아이들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채연이도 먹고 간다고 했다.
'어. 그럼 운동 갔다 와도 되겠는데?'
마구니가 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먼저 얘기했다.
"여보. 그럼 운동 갔다 와"
"그럴까?"
집에 들어선 지 5분도 안 돼서 다시 퇴장했다.
"소윤아, 시윤아 안녕. 아빠 운동 갔다 올게. 채연이도 밥 맛있게 먹어"
운동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애들은 일찍 재울 테니 자유시간 하고 와요]
오늘은 아내에게 궁예가 빙의했나. 어쩜 내 마음을 그리 정확하게 읽어내지. 사실 아침에 출근하며 운동가방을 챙길 때부터, 내심 자유시간을 염두에 뒀다. 자유시간이라고 해 봐야 카페 가서 노트북 깨작거리는 게 전부고 그게 엄청난 쾌감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고 있으면 왠지 생산적인 인간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을 때가 있다.
[나 아무것도 안 챙겨 옴]
거절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단 집에 들어가서 자유시간을 위한 도구(노트북, 책 등)를 챙겨 와야 한다는 걸 알렸다. 운동 끝내고 헬스장을 막 떠나려던 때, 아내는 애들이랑 자러 들어왔다며 카톡을 보냈다. 집 앞에서 들어가도 되냐고 카톡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날이 너무 추워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경험상 방 안에 있으면 생각보다 바깥소리가 잘 안 들린다. 조심조심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있는데 안방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보니 아내의 푸념 내용은 이랬다.
[엄마도 졸린데 자꾸 일어나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 소윤이도 얼른 자야지 뭐 하는 거냐]
여보. 고마워. 그 눈물겨운 헌신과 수고,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
눈에 밟히는 재활용 쓰레기도 함께 챙겨서 다시 집에서 나왔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도착했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다시 나왔어"
"아. 집에 왔었어?"
"어. 조용히 챙겨서 나왔지"
배가 고팠다. 한 시간 동안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하체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자꾸 햄버거 생각이 났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안 먹었다. 바로 카페로 갔다. 쿠키를 하나 살까 말까 하다가 안 샀다. 먹어 봐야 배도 안 차고 살만 찔 텐데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어 시간 동안 열심히 일기를 쓰면서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아내는 시윤이가 깨서 문을 열고 나왔다며 방에 누워 있다고 했다. 상황은 수시로 변했다. 재우고 나왔다더니 금방 또 깨서 다시 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잠시 후에는 또 소윤이가 깼다고 하고.
여보. 고마워. 여보의 그 헌신과 수고.
한 서너 차례 들락날락했나 보다. 집에 들어갔을 때는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방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 속에 보다가 일시 정지된 [남자친구] 화면이 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마시다 만 카페라떼가 있었고. 왠지 모를 아내의 처절함이 느껴졌다.
한 시간쯤 지나고 아내가 나왔다.
"하아. 허탈하다"
"그러게. 고생했어"
"흐아. 왜 이렇게 깨"
"그러니까. 소윤이가 한이 많은가 봐"
이미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내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고마워. 여보의 그 초연함.
오늘의 다행인 점 세 가지.
1. 시윤이가 독감이 아닌 것
2. 시윤이가 더 이상 열이 나지 않는 것
3. 격정의 밤을 보낸 아내가 열불이 나지 않은 것
여보. 미안해. 내일 금요일이네.
교회에 같이 가도, 집에 머물러도. 어느 하나 쉽지가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