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7(토)
그러고 보니 내일이 어버이날이었다. 여행 아닌 여행을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자녀를 낳아서 기르며 부모 노릇 하느라 정신이 없이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덕분에 부모님의 노고에 제대로 감사하게 된다. 그걸 얼마나 표현하고 사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이렇게 어버이날이라도 핑계를 삼아야 한다.
먼저 (내)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가 밥을 사겠다고 하면 한사코 거절을 하실 게 뻔하니까 소윤이를 앞세웠다.
“할머니. 우리 점심 사 주세여”
엄마, 아빠는 속초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차를 가지고 1박 2일 여행을 가서 차박을 한다고 했다. 평소의 엄마와 아빠의 행동 양식에 근거하면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는 계획이었다. 작년 어버이날에도 안 와도 된다고 하는 걸 기어코 가서 만났었다. 아내와 나의 의도는 ‘어버이날인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뵈어야지’였는데, 현실은 ‘보면 좋지만 힘들기는 오지게 힘든’ 손주와의 시간이었다. 효도하겠다고 찾아가서 얻어먹기도 더 많이 얻어먹었고. 올해는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꾸민 엄마와 아빠의 가짜 계획일 가능성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진짜인가 싶기도 했다.
일단 집에 안 계실 거라고 하니 엄마, 아빠에게 가는 건 취소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어떠신지 여쭤봤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하셨다. 점심을 사서 장인어른 댁에 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부지런히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드릴 편지를 썼다. 소윤이는 한참 열심히 썼는데 시윤이는 금방 딴짓을 했다.
“시윤아. 편지 안 써? 나중에 시간 없어서 못 썼다고 그러지 말고 얼른 써”
“저 다 썼어여”
“벌써?”
“네. 다 썼어여”
진짜인가 의심스러웠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피자와 치킨을 사서 갔다. 이게 과연 ‘어버이날 음식’으로 적합한가 의문이 들기도 했고, 적합하지 않다는 내적 결론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래 이거다’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났다.
아내의 조카(아내 오빠의 아들)도 있었다. 나에게도 조카지만 아직은 ‘아내의 조카’ 느낌이다. 그 녀석이 서윤이만큼 커서 나와 관계를 쌓으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무튼 ‘평생 분노라고는 모르고 자랄 것 같은’ 선한 얼굴을 가진 조카는, 분유를 잔뜩 먹고 나서 잠을 자러 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다. 졸리긴 했는데 자기는 싫었나 보다. 그런 조카를 보는 내가 졸렸다.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소윤이가 책상에 앉아 (내) 엄마, 아빠에게 줄 편지를 쓰고 있었다. 소윤이 뒤 침대에 누웠다. 소윤이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그대로 잠들었다. 아내가 들어와서
“여보. 이제 일어날 거죠?”
라며 나를 깨웠다. 정말 푹 자고 개운한 느낌이었는데 쉽게 눈이 떠지지는 않았다. 시간을 보니 두 시간이 지났고, 조카는 이미 가고 없었다. 어버이날은 그저 거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저녁에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나와 아이들은 (내) 부모님 집에 가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몰래 카네이션과 편지를 놓고 오는 것도 나름대로 깜짝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좋다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아직 잠을 떨쳐내지 못하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아이들 저녁도 먹여 주셨다.
아내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와 아이들은 (내)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생각보다 길이 막혔다.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빠. 서천에 갔다 오니까 한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아여”
하긴. 일곱 시간도 앉아 있었는데 한 시간은 식은 죽 먹기겠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한 시간 내내 깔깔대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일 정도로. 소윤이와 시윤이가 정말 웃길 때 내는 웃음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서윤이는 계속 자기가 좋아하는 찬양을 틀어 달라고 했다.
“아빠아. 따냥 뜰어주데여어”
“찬양? 무슨 찬양?”
“문드아 따냥. 내가 도아하는 거어”
‘문들아 머리들어라’라는 찬양인데, 소윤이가 좋아해서 요즘 많이 들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그걸 좋아한다면서 계속 틀어달라고 한다. 곧잘 따라 부른다. 어른들의 몸짓까지 따라 하면서. 나도 지루할 틈이 없는 한 시간이었다.
부모님 집 주차장에 아빠 차가 보였다. 집에 불은 꺼져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식탁 위에 지갑을 비롯한 자잘한 짐들이 놓여 있었다. 왠지 멀리 떠나신 느낌은 아니었다. 약간 예상했던 대로 ‘어디 안 가고 집에 계셨나?’ 싶었다. 카네이션과 준비한 선물, 아이들의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서윤이는 그새 장난감을 꺼내 왔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아빠아. 더 똥 따떠여어”
라며 나에게 다가왔다. 서윤이도 씻기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씻겼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눕히고 재울 생각이었다. 10분 정도 있다가 바로 나왔다. 차에 탔는데 시윤이가
“아빠. 거기 봉투에 엄마, 아빠한테 쓴 편지도 있어여”
라고 했다. 엄마, 아빠에게 줄 편지까지 쓸 시간이 있었나 싶었지만 어쨌든 다시 집으로 올라갔다. 시윤이가 말한 봉투 안을 열어 보고 혼자 웃었다. 시윤이가 쓴 편지는
“할머니 사랑해여”
“할아버지 사랑해여”
“아빠 사랑해여”
“엄마 사랑해여”
라고 각각 쓴, 작은 별 모양의 종이였다. 시윤이가 직접 오린 종이였는데 각각의 크기가 오백 원짜리 동전 정도였다. 그 안에 저 글자들을 다 적는 건 불가능했다. ‘할’ 자 위에 ‘머’자를 겹쳐서 쓰고, 또 그 위에 ‘니’ 자를 겹쳐서 쓰고 이런 식이었다. 아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다 썼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엄’, ‘빠’ 자가 보이는 별 모양 종이 두 개를 챙겨서 다시 차로 왔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잠들었고 소윤이는 잠들지 않았다.
“소윤아. 또 소윤이랑 아빠만 남았네?”
도착해서 시윤이를 깨웠다. 서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으니 내가 안아야 했고, 시윤이는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자는 걸 깨우면 막 짜증 내고 우는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는 경우가 아예 없다. 많이 컸다. 다 씻겨서 왔으니 손만 씻겨서 방으로 들여보냈다. 서윤이가 이미 자고 있어서 난 함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굳이 왜 왔냐며
“얘가 왜 이럴까. 아니 그 밤중에 뭐 하러 와”
라는 말을 반복했다. 어버이날이 무슨 대수냐면서. 엄마는 내일 이쪽으로 와서 맛있는 걸 사 주겠다고 했다.
“됐어. 나 축구하러 가야 돼. 뭘 와. 괜찮아”
“아니야. 갈 거야. 너 축구하러 가는 곳 근처에서 먹으면 되지”
덕분에 우리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만 신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