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실감하는 첫째의 존재감

22.06.04(토)

by 어깨아빠

그동안 아이들을 들먹거린 건 핑계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졌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없었는데도 목표했던 시간보다 늦게 일어났고 늦게 출발했다. 아이들을 챙기느라 늦었다는 말은 그럴 싸한 변명일 뿐이었다.


늦은 만큼 서둘러 준비하고 집에서 나왔다. 목표했던 시간보다는 늦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울산을 목적지로 입력하니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도착하면 점심 먹고 볼 일 보고, 그 후에는 아내와 데이트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볼 생각도 했다.


차가 꽤 막혔다. 차가 무지하게 막혔다. 차가 미친 듯이 막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도착 예상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설마설마하는 사이, 무려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 어이가 없었다. 휴게소도 엄청 잠깐 들렀다. 꼬박 아홉 시간을 도로 위에 있었다. 데이트고 영화고 다 물 건너 간 지 오래였다. 가자마자 일을 보느라 바빴다.


장인어른은 아침 일찍부터 시윤이를 데리고 카센터에 가셨다. 이것저것 수리를 맡기느라 바쁘셨을 거다. 그래도 시윤이가 혼자 있을 때는 굉장히 말을 잘 듣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으셨을 거고. 차 수리를 끝낸 뒤에는 소윤이를 데리러 가셨다. 소윤이는 점심시간쯤 캠프가 끝났다. 할아버지와 동생을 만난 소윤이와 통화를 했다.


“소윤아. 어땠어?”

“너어어어어무 재밌었어여”

“아, 진짜? 뭐가 제일 재밌었어?”

“챔피온1250 간 게 너무 재밌었어여. 거기서 짚라인도 탔어여”

“아 그래? 어제 고기는 맛있게 먹었어?”

“네. 근데 고기가 좀 많이 식었어여. 어제 마시멜로도 구워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어여. 제가 선생님한테 다섯 개 먹고 싶다고 했는데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두 개 주셨어여”


소윤이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엄마, 아빠 곁을 떠나 하룻밤을 보내느라 무서웠거나 힘들었다는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와 내가, 특히 내가 소윤이를 너무 보고 싶었다. 사실 요즘 소윤이에게 느끼는 주된 감정은 ‘든든함’이다. 이렇게 순수하게 ‘보고 싶음’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보. 나중에 소윤이 결혼하면 어떻게 하지?”


배우자를 잃은 슬픔에 비견할 만한 우울에 휩싸이지 않을까 싶다.


서윤이에게도 전화를 해 보고 싶었는데 괜히 서윤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까 봐 못했다. 뭘 하고 있는지, 잘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참아야 했다. 사실 언제나 애들은 괜찮다. 오히려 엄마, 아빠를 잊은 듯 잘 지낸다. 오히려 아내와 내가 더 안달이 난다.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 덕분에 운전만 하느라 더 아이들 생각이 났다. 장인어른과 소윤이, 시윤이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통화를 한 번 했다. 다른 말은 기억이 안 나고 딱 이 말만 기억이 난다.


“아빠아. 아빠 어디에여어. 아빠 보고 지픈데에에”


소윤이도, 시윤이도 먼저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했다. 서윤이만,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빠가 보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다. 무한한 사랑으로 막내딸을 키운 보람을 느꼈다. 시윤이한테 아빠 안 보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아빠는 안 보고 싶고 엄마만 보고 싶다고 했다.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아내도 나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차에서 워낙 오랜 시간을 허비한 덕분에 어차피 시간도 없었지만,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데이트고 뭐고 할 기분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사이에 일이 좀 틀어졌고, 굉장히 맛있는 돈까스였는데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열불이 나는 속을 가라앉히고 복잡해지는 머리를 진정시키느라 돈까스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밥 먹고 나와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원래 시간이 남으면 옷을 사러 갈 계획이기도 했다. 아내는 ‘보복 소비’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게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았다(그래 봐야 아주 소박한 금액이었지만). 덕분에 내 옷도 두어 벌 생겼다.


카페에 가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꼬였던 일이 다시 풀리기 시작했고 아내와 나의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아이들 생각이 났다.


잠은 여름마다 찾는 K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K의 첫째를 보니 소윤이가 생각났고, 둘째를 보니 시윤이가 생각났고, 막내를 보니 서윤이가 생각났다. 차례대로 아이들을 씻기며 재울 준비를 하는 K와 그의 아내를 보고 있노라니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들에 비해 내가 너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오늘 잠들지 않았다. 재울 애들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