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이지만 햄버거는 먹고 싶어

19.01.08(화)

by 어깨아빠

가끔씩 몸이 안 좋을 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약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밤새 39도를 웃돌던 열은 아침이 되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도 신음 소리를 내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밤새 끙끙 앓았다. 아침이 되어서는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1년 이상 경험하면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아파도 출근은 해야지' 증상을 보였으나, 아내의 강력한 만류로 회사에 결근을 통보했다.


그러고 나서도 한 숨 더 잤는데, 역시나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단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집 앞에 있는, 몇 번 가봤는데 괜찮았던 내과에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대기 환자의 80% 이상이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내 옆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내 또래로 보이던 젊은 여자는 자기 대기 순서가 뒤로 밀렸다며, 항의를 겸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내가 그 여자의 바로 다음이었고, 나도 내가 밀린 걸 알아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기실의 TV에서는 [한국인의 밥상]이 나오고 있었는데, 최불암 아저씨가 먹는 한우 고기가 그렇게 맛나 보였다. '저거 한 점 먹으면 병 싹 나을 것 같은데'라는 모태 식충이 같은 생각을 하며 순서를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어젯밤부터 고열이 나고 몸살 증세가 있어서요"

"아. 목은 아프지는 않구요?"

"네"

"속도 불편한 데 없으시고?"

"네"

"열나는 거 말고는 아픈 데 없으세요?"

"콧물이 좀 많이 나고, 머리가 많이 아파요"

"열은 어제부터 나셨다고 했죠?"

"네"

"(체온계를 귀에 꽂으시고) 음, 지금도 38.9도네요"

"아. 네"

"주변에 독감 환자는 없으셨나요?"

"한 2주 전쯤에 아내가 a형 독감이었어요"

"아. 그래요"


소크라테스 진료법인가.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며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어라. 이건 독감에 가까운 증상인 것 같은데?'


간단한 문답을 마치고 선생님은 확인에 들어가셨다. 목도 살피시고(목은 정상이네요), 폐 소리도 들으시고(폐 소리도 깨끗하구요).


"독감이 의심되는데요. 검사를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아. 네 그럼 혹시 독감이면, 주사로 맞을 수도 있나요?"

"네. 주사로 맞으셔도 돼요"


한 10여분 대기하고 나서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독감이시구요. 나가서 주사 맞으시면 돼요"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머리도 터질 듯 아프고, 온몸에 기운도 쭉 빠지고. 얼마 만에 맞는 링거 주사인지, 30여분 침대에 누워 똑똑 떨어지는 페라미 플루를 받아먹었다. 주사 맞는 동안 아내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아내의 독감이 끝인 줄 알았는데. 전국적으로도 독감 뉴스가 잦아드는 것 같았는데. 방심했나. 아니, 뭐 방심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피할 수도 없었겠지만.


애들한테 전염이 될 가능성을 고려해 나의 거취(?)에 대해 고민했으나, 딱히 방도가 보이지 않아 그냥 집에 머물기로 했다.


"아빠. a형 독감이래요?"

"어. 소윤아"


"아빠아. 아빠아"

"어. 시윤아. 아빠 아프시대"

"아빠. 아뽀. 아뽀"


아픈 와중에도 배고픔이 느껴졌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탓인지, 병원에서 본 한국인의 밥상 탓인지. 아무튼 아내가 끓여 놓은 황태 계란국에 밥을 말아서 먹었다. 아내가 시윤이를 재우는 동안 소윤이와 함께 거실에 있었다. 소윤이는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누워 있기만 하는데도, 거실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자체로 만족했다. 소윤이는 계속 혼자 이것저것 하면서 놀고, 난 그런 소윤이를 누워서 지켜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들리는 규칙적인 똑똑똑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소윤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윤아. 뭐해? 문 두드리면 안 돼"

"아니. 엄마가 너무 안 나와서여"

"어. 알았어. 아빠가 들어가 볼 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아내가 먼저 나왔다.


"아. 잠들었어"


그대로 아내와 교대했다. 나의 날숨을 통해 분출될지도 모르는 독감 바이러스가 시윤이에게 전달될 것만 같아 꺼림칙했지만, 마스크가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침대에 누웠다.


자면서도 몸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고. 다시 눈을 떠보니 몸이 다 젖어 있었고, 그만큼 몸도 좋아졌다. 약의 힘인가. 병원 갔을 때가 20% 정도의 몸상태였다면, 이때는 한 50% 정도였다.


아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애 둘 육아에, 아픈 남편 이마에 물수건까지 올려 주느라 더 힘겨워 보였다.


"여보. 힘들지"

"아니. 괜찮아. 여보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마스크를 쓴 채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운이 온전하지도 않은 데다가 괜히 애들이랑 가까이 있다가 옮길까 봐. 다행히 몸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열도 37도대로 떨어지고.


"여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갑자기 웬 먹고 싶은 거?"

"그냥 아프니까. 잘 먹어야지"

"괜찮아. 그냥 아무거나 집에 있는 거 먹으면 되지"

"그래도. 뭔가 여보 먹고 싶은 거 먹으면 좋잖아"


계속해서 나의 '먹고 싶은 것'에 대해 물어오는 아내 덕분에 머리를 굴리다 보니, 불현듯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여보. 나 먹고 싶은 게 생각났다"

"뭔데? 뭔데?"

"햄버거"

"햄버거? 햄버거 먹고 싶어?"

"어. 햄버거"


아내는 장도 보고 바람도 쐴 겸, 소윤이랑 시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소윤이는 쌀국수가 먹고 싶다길래, 집 앞에 있는 저렴한 쌀국수 프랜차이즈에 들러 쌀국수도 사 왔다.


놀랍게도 나의 욕구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였다. 햄버거는 놀라우리만치 맛있었고, 술술 넘어갔다. 보통 알고 있던 독감 환자들의 행태와 너무 다른 스스로의 모습에 약간의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란 말인가.


"여보. 독감 걸리고 햄버거 먹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아내는, 평소보다 유난히 잘 먹는 두 녀석에게 면발을 다 퍼주고, 채 익지 않아 뻣뻣한 숙주와 매운 향이 그대로 살아 있는 양파만 남은 형태만 남은 쌀국수를 먹었다.


"아. 여보. 입 안에 양파 향이 가득해"


소윤이랑 시윤이는 속 시원하게 잘 먹었다.


함께 있지만, 아무것도 보탤 수 없는 마네킹과 같은 존재로 있다 보니 영 미안했다. 먹이는 것도, 씻기는 것도, 재우는 것도 아내 홀로였고, 난 바라만 볼뿐.


"여보. 힘들지"

"아니. 괜찮아. 난 그래도 여보 있으니까 좋은데. 주말 같고"

"있으면 뭐 해.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니야.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안 심심하고 좋아"


그래도 나름의 역할이 하나 있었다. 보통 아내에게 들어보면 시윤이가 시도 때도 없이 징징거리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기의 유일한 보호자가 엄마니까 죽으나 사나 엄마한테만 들러붙고 더 징징거리는데, 오늘은 아빠가 있어서 그런지 울만한 일이 있어도 나한테 와서 심신의 위로를 얻는 모양이었다. 아침에 잠깐 운 것 말고는 하루 종일 계속 기분이 좋았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간 사이 거실에서 기다렸다. 원래 환자의 도를 따르자면 나도 같이 들어가서 자는 게 맞지만, 낮에 워낙 많이 자기도 했고 몸도 많이 회복돼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는, 부실했던 저녁을 보충하기 위해 어제 편의점에서 사 온 인스타에서 핫하다는 간편 떡볶이를 조리해 먹었다. 조리라기보다는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정도였다. 그 후에는 역시 어제 사 온 콘칩도 먹었다. 나랑 나눠 먹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독감이지만 어쨌든 빠르게 회복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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