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약물 파티

22.07.04(월)

by 어깨아빠

서윤이가 겉보기에 더 안 좋아지거나 힘들어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미열은 계속 있었다. 아내는 아침에 병원에 다녀 오려고 했는데, 그 이른 아침부터 또 작은 사건이 생겼다.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정말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시윤이와 소윤이가 서로 체온계를 가지고 다투다가, 체온계가 바닥에 떨어져서 고장이 났다. 체온계를 꺼내서 가지고 노는 시윤이에게, 소윤이는 만지지 말라며 체온계를 빼앗아 오려고 했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떨어뜨린 거다. 아내의 메시지에서 잔잔하면서도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는 시윤이가 또 막 짜증을 낸다고 했다.


일부러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와 통화를 하기 위한 것보다 시윤이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거리 훈육이나 부탁(?)이 장기적으로 과연 나은 방법인지는 확신이 없지만, 그래도 일단 전화를 했다. 당장 잠시라도 아내의 숨구멍을 트이는 효과는 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은 시윤이가 막 끝까지(?) 간 건 아니었다. 그 전에 전화를 한 거다. 시윤이는 또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걸 듣던 아내는 시윤이에게


“와. 시윤아. 시윤이는 아빠랑 통화할 때는 목소리 자체가 달라지네?”


라며 푸념하듯 얘기했다. 그 뒤로 어땠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자세히 얘기를 안 했다. 괜찮았냐고 물어 보면 굉장히 찜찜하게


“..어. 뭐. 괜찮았어..”


이런 느낌으로 답할 때가 많았다. 다만 ‘아내도 감추지 못할 정도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나 보다’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우선 소윤이는 예상대로 코 점막이 굉장히 부어 있었는데, 부비동염으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했다. 기침, 콧물 약은 물론이고 항생제도 좀 먹이기로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비슷한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코가 많이 부어 있고 콧물이 많이 찼다고 했다. 어제 서윤이가 자꾸 귀가 아프다면서 울길래 혹시 귀 쪽에 염증이라도 생겼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귀는 깨끗했다고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도 기침 약, 콧물 약을 좀 먹이기로 했다. 자연 치유력 혹은 자연 저항력을 기르기 위해 약을 절제(?)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셋 다 아프니 뭔가 의지를 상실했다.


‘그래. 약 좀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얼른 나아라. 차라리’


이런 심정이었다.


오늘도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제안했고, 아내는 수용했다.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제안할 때,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애들한테 미리만 말해 주고. 저녁을 알아서 먹일 테니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아내가 누굴 만나야 하거나 약속이 잡힌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혼자 쉬든 갑자기 약속을 잡아서 누굴 만나든 분리와 자유가 중요한 거니까.


아내는 미리 조건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자꾸 주방에서 뭘 하려고 했다. 채근에 채근을 더해서 1초라도 빨리 아내를 내보내려고 노력했다. 아내가 냉동실에 얼린 토마토가 있다면서 토마토계란볶음밥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아내는 제안을 남기고 떠났다. 토마토는 신기한 식재료다. 계란만 볶아서 줄 때는 뭔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때도 있는데 토마토가 들어가면 뭔가 그럴 싸한 음식을 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양공급의 측면에서도, 심미의 측면에서도.


난 라면을 먹었다. 라면 한 봉지에 소면을 조금 더 섞어서 먹었다. 배가 많이 고팠다. 내가 만든 건강한(?) 볶음밥을 먹기 싫었다. 쾌락의 음식을 먹고 싶었다. 기왕 쾌락에 빠지는 건데 한 봉지는 약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 봉지는 좀 많았고(물론 거뜬히 먹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소면을 조금 더 넣은 게 나름의 절충안이었다. 라면이 끓고 있는 냄비에 소면을 촤라락 펼쳐서 넣고 김치를 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소윤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빠. 아빠”

“왜?”

“저기”


소윤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냄비에 펼쳐 넣은 소면에 불이 붙어 있었다. 물론 아주 작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잘 저어서 모두 물에 잠기도록 했다. 그래도 소윤이가 아니었으면 더 크게 번졌을지도 모른다. 희박한 가능성이겠지만.


밥 먹고 약을 먹을 때도 소윤이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 약은 어디에 있는지, 항생제는 냉장고 어디에 있는지, 물약 통은 어디에 있는지 다 알려 줬다. 셋이 동시에 약을 먹으니 약 타는 것도 은근히 번거롭다. 그래도 다들 약을 잘 먹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싫어도 잘 먹을 나이지만 서윤이는 아직 아닌데도 잘 먹는다.


“꾸우꺽. 꾸우꺽”


꼭 말을 하면서 꿀꺽꿀꺽 잘 삼킨다. 기왕 먹는 거 찰떡같이 약발을 받아서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자유시간을 보내고 온 아내의 손에 뭔가 짐이 한가득이었다. 장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싸 주신 짐’의 기운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역시나 아내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이제 정말 이렇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자유 시간에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만날 때가 많다. 사실 그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만날 사람이 부모님 말고는 없기도 할 거다.


지금 아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보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이 더 필요하고 고파서 그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