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2(금)
점심 약속이 있었다. 장소는 명동이었다. 아내와의 추억이 가득한 장소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조금 걸어 다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오래 걷지는 못했다. 아내는 마침 오늘 좋아하는 도넛 가게의 명동지점이 문을 열었다면서 그걸 사다 달라고 했다. 정말 신기하다. 그런 일정은 어떻게 그렇게 바삭하게 알고 있는 걸까.
점심 만남을 마치고 아내가 내려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난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주소를 못 찾겠던데 아내는 정확한 주소를 알려줬다. 아내의 지시대로 도넛 8개를 사서 나왔다(집에 와서 보니 여섯 개였다. 아마 내가 주문을 잘못했나 보다). 백화점에도 들렀다. 반바지를 하나 사야 했다. 굉장히 어색했다. 평일 대낮에 혼자 옷을 사러 가는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기분은 좋았다. 오랜만에 육아와 직장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원증을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 많은 사람의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기는 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아내와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안 좋았다.
“여보. 왜?”
“아니야 그냥”
“왜? 또 시윤이가?”
“아니 뭐”
아내는 시윤이가 듣고 있으니 자세히 말하지 못했지만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깊이와 정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내는 서윤이를 재우러 들어가고 없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만 거실에 있었다.
“아빠. 도너츠 사 왔어여?”
“어, 사 왔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빵으로 태교를 한 아이들답게 역시나 잘 먹었다. 내 자녀들이 이런 걸 너무 잘 먹길래 아이들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아무튼 둘 다 엄청 잘 먹었다. 잠시 후 아내도 서윤이를 재우고 나왔다. 아내의 표정에서 묻어 나오는 게 피곤인지 슬픔인지 우울함인지 지침인지 잘 분간이 안 됐다. 아무튼 힘이 없어 보였다.
열심히 도넛을 먹고 식탁에 앉아 까불거리며 나와 장난도 치고 대화를 나누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저 뒤에 소파 앞에 앉은 아내가 아주 옅은 미소로 보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은 아니었다. 뭐랄까. 자포자기의 심정이 느껴졌달까. 이번 주 들어 처음이었다. 시윤이와 그렇게(?) 됐던 건. 화요일부터 계속 내가 있었고 항상 함께 있었다. 처음으로 자리를 비운 게 오늘이었는데 그때 또 일이 벌어진 거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빠와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는 아들을 보는 아내의 눈빛에 복잡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네덜란드를 상대했는데 그때 결과가 5 대 0 이었다. 세번 째 골을 먹었을 때까지만 해도 엄청 화가 났는데 다섯 번째 골을 먹었을 때는 화도 안 났다. 오히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내의 표정이 딱 그거였다.
글쎄.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한 길을 못 찾고 있다. 아내가 표현하기를 ‘여보가 있으니까 시윤이가 천사가 됐네’ 라고 했다. 그저 나의 존재로 태도가 바뀌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에 관해서도 확신이 없다. 오늘만 봐도 그렇다. 당장 내가 없어지니 바로 돌변(?)하여 아내에게 힘든 시간을 선사했다. 남편이자 아빠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과 각종 정보들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공감’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감만 해서는 또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 감정 없이 ‘헐, 대박, 진짜’만 반복하는 기계는 언젠가는 밑천을 드러낼 거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시윤이가 어둡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아내에게 어두운 시간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게 차라리 맞을 거다. 삶의 방식을 약간 바꾸는 것을 앞두고 있고, 변화의 핵심은 ‘시간의 확보와 자유로운 활용’이다. 이 변화가 시윤이와 아내에게도 더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라고 있다. 매우 소극적이지만 이게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해결책이다. 혹시라도 그전에 아내의 정신과 마음이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또 막상 아내의 어두운 기운이 나에게 흘러오면 그걸 태연스럽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 같다. 아무튼 오늘도 내가 부재한 시간에 선명해진 시윤이와 아내의 어두운 시간에 마음이 아팠지만, 참고 기다렸다.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빠가 있을 때라도 그러지 않는 게 어디냐는 생각도 하고.
저녁에는 다 함께 금요철야예배에 갔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금요철야예배였다. 반주는 아니라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시윤이는 예배 시간에 잠들었고 서윤이는 끝날 때까지 안 자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들었다.
“여보. 여보 출근 안 하면 그때부터 정리 빡세게 해야겠다”
라고 아내와 이야기하곤 했는데, 아직도 뭐 된 게 없다. 하는 것도 없이 뭐가 이렇게 바쁜지. 언제 시간은 또 이렇게 흘렀는지. 버리고 정리할 게 태산 같이 많은데 오늘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가 끝났다.
물론, 정리와 버리기 보다 가치 있는 만남 때문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