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밤에도 패배

19.01.16(수)

by 어깨아빠

다행히 나와 아내만 탈출에 성공했다. 밤에도 모자라 아침에도 몰래 탈출해야 하는 신세라니. 이마를 톡 하고 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 것처럼 졸린 와중에도, 아내는 먼 길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다. 서둘러 집을 나서야 아내도 애들이 깨기 전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누울 수 있다.


"여보. 빠이빠이"

"잘 갔다 와요"


하도 애들이랑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 아내랑 대화할 때도 [애들 전용 말투]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아내가 나의 행동을 보고 심심찮게 "옳지"라고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아내와 아이들은 홈스쿨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아침에 연락이 쉽지 않다. 아내한테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나도 굳이 연락하지 않는다. 총성만 없을 뿐, 전쟁과 흡사한 아침을 보내고 있을 게 뻔하니까.


궁금하던 차에 아내에게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시윤이가 카페로 추정되는 어느 장소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는 사진. 사진만 보면 그냥 귀여운 아들 사진이지만, 앞 뒤 사정을 생각해 보면 그리 단순한 의미는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카톡이 이어졌다.


[폭망]


실제 카톡에서는 수없이 많은 ㅋㅋㅋㅋㅋㅋㅋ가 동반되었고, 참으로 덧없이 느껴졌다.


[카페 재우기 실패?]

[유모차 옮길 때 깼어]


홈스쿨 모임을 마치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느 카페로 가는 길에 시윤이가 차에서 잠들었다는 것까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유추가 가능했다. 애석하게도 잠든 시윤이를 유모차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변이 발생한 것이다. 소윤이가 걱정됐다. 엄마와의 데이트를 갈망했을 소윤이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그로 인한 후폭풍을 아내도 짊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소윤이가 슬퍼하겠다]

[응 쫌. 그래도 내가 더 슬픈 척하기 전에 작전 섰더니 금방 나아졌어]


아내가 말한 '작전'이라는 건 아마도 먹을 걸 대령했거나, 아니면 소윤이가 엄청 흥미를 가질 만한 유흥(?)거리를 제공했다는 얘기일 거다. 어느 카페냐고 물었더니 월요일에도 갔었던 그 카페라고 했다. 새로운 단골 카페가 탄생할 조짐이 보인다.


잠시 후 영상 통화도 했는데, 아내는 소시 남매의 수발을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보.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집에 가고 싶다"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기대와 다른, 시윤이의 기상으로 인해 많은 것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후의 여정을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퇴근했을 때, 아내는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고 애들은 나름대로 각자 무언가에 열심이었다. 아빠의 등장과 함께 소윤이는 아빠 하고만 할 수 있는 각종 놀이나 행위를 열거 혹은 실천하기에 정신이 없었고, 시윤이도 말만 못 할 뿐 누나랑 비슷한 맥락의 몸짓을 보였다.


"아빠. 이리 와 봐여. 이렇게 누워 봐여"

"소윤아. 밥 다 됐어. 아빠랑 그만 놀고 이제 밥 먹어야 돼"


소윤이의 말에 아내가 대답을 가로챌 때, 눈치를 잘 봐야 한다. 이럴 때


"소윤이가 나랑 놀고 싶다잖아. 10분만 있다가 먹자"


라는 식의 말을 날리면, 죽방이 날아와도 할 말이 없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모범 답안은


"엄마가 이제 밥 먹어야 된다고 하네. 가서 앉자"


이거다. (그런 경우는 드물겠지만) 정말 내가 소윤이랑 더 놀고 싶다면, 이렇게 얘기해야 한다.


"엄마. 딱 5분만 더 놀고 밥 먹어도 돼여?"


아내가 된다고 하면 그렇게 하면 되고,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의자에 앉으면 된다. 오늘의 나는 더 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아내의 이야기에 힘을 실었다.


"소윤아. 엄마가 밥 먹으래. 얼른 먹고 또 놀자"


나를 빼고 모두가 무지하게 졸려 보였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아내도. 남은 저녁 일정을 부지런히 마치고, 월요일처럼 아내가 애들을 재우고 난 헬스장에 갔다. 운동이 끝났을 무렵,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나 쫌 전에 나왔어. 잠들었다가]


낮이나 밤이나, 아내가 졌구나.


집에 가보니 집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 아니지. 그냥 이미 개판이었다.


"여보. 오늘은 그냥 둬"


정말 집은 그대로 두고, 각자 할 일에 몰두했다. 한창 무르익었을 때쯤, 또 시윤이가 등장했다. 아내가 수면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양치)을 거행한 후 시윤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난 거실에 남아 허던 걸 마저 하려는데, 한 15분여 뒤에 시윤이가 또 방문을 열고 나왔다.


"뭐야. 시윤이 왜 나왔어?"

".........."


시윤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니 그대로 방문을 닫고 다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방문을 열고 시윤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시윤아. 왜? 아빠 들어가서 잘까?"

"응"

"아빠 일 해야 하니까 먼저 자고 있어. 엄마 옆에 누워서. 알았지?"

"데에"


그리고 또 10여분 후. 그가 다시 등장했다.


"시윤아. 왜 또 나왔어"

"..........."


아까처럼 다시 말없이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을 힘으로 막으며 얘기했다.


"시윤아. 일어나지 말고 엄마 옆에 누워서 자. 알았지?"

"응"

"네, 해야지"

"데에"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시윤이는 또 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에는 다시 닫고 들어가지 않고 계속 나를 쳐다봤다. 삼고초려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나오다니.


"시윤아. 아빠도 들어갈까?"

"응"

"아빠랑 같이 누워서 자고 싶어?"

"응"

"알았어. 그럼 아빠 금방 들어갈 테니까, 시윤이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있어. 알았지?"

"으으으(아니야)"

"아빠 금방 들어갈 거야. 누워서 기다려. 알았지?"

"데에"


세 번씩이나 나와서 나를 호출하더니 정작 시윤이는 매트리스 위에 혼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엄지 손가락은 입 속 깊숙이 박혀 있었고. "뽁"하는 이탈음이 들릴 정도로 강력하게 흡착된 엄지 손가락을 빼내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육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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