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9(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뭔가에 홀린 듯 잠에서 깬 애들을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아빠. 엄마도 깨우고 싶어여"
"아니야. 아니야. 엄마는 조금 더 자게 놔둬"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미뤄 놓은 설거지가 눈에 걸렸다.
'이 게을러터진 어제의 강지훈아. 어제 좀 해 놓지. 왜 나한테 미루니'
"아빠. 우리 뭐하고 놀까여?"
"어. 소윤아. 아빠 일단 설거지를 좀 할 게"
"왜여?"
"응. 설거지가 너무 많아서. 설거지를 해야 너네 아침을 먹을 수가 있을 것 같아"
"아빠랑 놀고 싶은데"
"설거지하고 아침 먹고 아빠랑 놀자. 알았지?"
그릇 몇 개를 닦다 보니 옆에 밥솥이 보였다. 당연히 설거지가 안 된 상태였다. 그것부터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쌀을 씻어서 밥을 안치고, 설거지하는 동안 쌀이 익어갈 테니. 시윤이가 언제 허기를 느끼고 '무조건 안아' 태도로 일관하며, 집안일을 마비시킬지 모르니 대비가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이는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와서는
"맘마. 맘마아. 맘마아아앙"
하며 밥상을 재촉했다.
"시윤아. 저기 봐봐. 지금 밥 하고 있지?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데에"
다행히 순순히 돌아갔다. 그래도 설거지하는 동안 애들이 알아서 잘 놀아준 덕분에 방해받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장모님이 사 주신 소고기를 구워 주려다가 양파랑 버섯, 파를 넣고 간장이랑 설탕으로 간을 해서 속성 불고기를 만들었다. 물론 엄청 싱겁긴 했지만, 아예 간을 안 한 것보다는 짭조름했다.
설거지 프로세스 및 맘마 대응 전략 매뉴얼, 급속 불고기 제작 등 숙련된 주부와 같은 움직임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을 때쯤 아내가 깨서 나왔다. 아내가 급히 현관 밖으로 나가더니 스티로폼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그게 뭐야?"
"어. 이제 마켓컬리에서 우리 집도 배송된다길래 시켜 봤어"
"아. 하긴 요즘 새벽 배송이 치열하더라. GS 슈퍼인가에서도 한다던데"
"어. 맞아"
아내가 스티로폼 상자 안의 내용물을 하나씩 냉장고로 옮겼다. 소파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가 못 보도록 뭔가를 가리고 있었다. 뭔가 하고 봤더니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었다. 내가 알기에 새벽 배송의 원래 취지는 당장 필요한 신선식품이나 각종 식재료를 빠르게 공수하기 위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내에게 하겐다즈가 급히 필요했나 보다. 점심때 하겐다즈 볶음을 만들려고 그러나.
오전에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미용실에 예약을 했다. 소윤이한테 같이 가겠냐고 물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시윤이는 데려갈 수가 없다. 가만히 있지를 않으니까. 소윤이만 데리고 나가는 걸 보면 슬피 울며 아내를 힘들게 할 게 걱정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없는 고민을 하다가 아내가 데리고 들어가서 낮잠을 재우기로 했다. 시윤이랑 아내가 먼저 방에 들어가고 나랑 소윤이가 나왔다. 시윤이는 낮잠 자기 싫다면서 울고 있었다.
소윤이는 머리 자르는 내내 방해도 전혀 안 하고, 오히려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소윤이 없었으면 심심해서 졸았을 거다. 머리 다 자르고 나서 1층에 있는 편의점도 갔다. 그냥 기왕 나온 김에 소윤이랑 조금 더 밖에 있다 가려고.
"소윤아. 단 건 안 되고. 먹고 싶은 거 골라"
"아빠. 초콜렛도 안 되여?"
"그럼"
"초코우유도?"
"당연하지"
"그럼 소세지는여?"
"소세지는 괜찮아"
"그럼 소세지랑 다른 거 하나 더 고를래여"
"소세지만 먹으면 돼지"
"아. 그래도여"
"그럼 고래밥?"
"그래여. 고래밥"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서 고래밥이랑 소세지를 나눠 먹었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내 봤는데, 시윤이는 여전히 자지 않고 있다고 했다. 11시 30분쯤 나와서 1시가 거의 다 됐을 때 들어갔는데, 시윤이는 안 자고 있었다. 아내와 교대했다. 처음에는 막 울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잠잠해지더니, 금방 잠들었다. 난 NBA2K18을 한판 다 하고 나왔다.
소윤이는 점심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요즘 소윤이는 매 식사 시간마다 30분의 제한시간을 두고 있다. 주어진 시간 안에 딴짓하지 않고 집중해서 밥 먹는 습관, 감사하며 밥 먹는 습관을 기르기 위함인데 실패할 때는 그다음 식사 때까지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간식 매니아인 소윤이에게는 꽤 슬픈 형벌이다. 오늘 실패했다. 밥그릇을 거둬 가며 저녁때까지 간식 금지라는 나의 이야기에 당연히 슬피 울었다. 안방 침대로 뛰어가며 얘기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미운가 봐아아아앙"
소윤이도 알고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고, 결코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는 걸. 다시 불러 놓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소윤이의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수긍의 폭이 넓어졌음은 물론이고 속도도 빨라졌다는 거다. 그리고 금방 잊는다. 예전 같았으면 계속 얘기하고 졸랐을 텐데.
시윤이는 그리 길게 자지 않고 일어났다. 오후에는 부모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미리 말했다.
"여보. 난 오늘 안 가고 싶어. 여보랑 애들만 갔다 와"
아예 혼자 집에 남지는 않고,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다. 소윤이한테는 일이 많아서 일을 해야 한다고 둘러댔다.
"아빠. 어디서 일 하는데여?"
"아빠. 회사 일이에여?"
꼬치꼬치 캐묻는 소윤이에게 내막(가기 싫어서 핑계 대고 빠진다는)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대답했다. 소윤이는 워낙 정확히 보고, 서술하니까. 2시간 30분쯤 후 다시 아내와 아이들과 재회했다.
"여보. 우리 저녁 어떻게 하지?"
"집에 가서 먹지 뭐"
"밖에서 먹자"
"그래. 그럼"
"뭐 먹지?"
"글쎄?"
"소윤이가 해까득 가고 싶대"
다 정해져 있으면서 왜 물어본 거지?
소윤이의 바람대로 해까득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소윤이의 메뉴는 늘 정해져 있다.
"아빠. 새우죽에 장조림 먹을래여"
새우죽 하나와 소고기 뚝배기를 하나씩 시켰다. 양이 많아서 메뉴 두 개만 시켜도 충분한 곳이다. 더군다나 난 야식을 계획하고 있었던 터라 저녁을 많이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야식과 저녁은 엄연히 다르니까)
시킨 음식이 나왔는데 너무 뜨거웠다. 시윤이는 빨리 달라고 난리인데 죽은 식을 생각이 없었다. 아내랑 나랑 둘이 여기저기 떠 놓고 열심히 불어대도 한참 걸렸다. 식은 죽 먹기는 쉬워도 먹일 죽 식히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초반에는 애들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아내랑 나는 숟가락 들지도 못하고 불어대기만 했다.
그래도 소윤이는 떠주기만 하면 알아서 식혀 먹기도 하고, 별로 흘리지도 않아서 손이 덜 갔는데 강시윤이 난리였다. 요즘 한 번씩 떠먹여 주는 걸 거부하고 곧 죽어도 자기가 먹겠다고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메뉴가 죽이라서 최악이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옷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더 많았다. 나중에는 그냥 될 대로 되라며 손을 놨다. 손을 놓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디 식당에 가면 다 먹고 테이블과 바닥을 닦는 게 일상이 되었다.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소윤이가 계산대에 놓인 사탕을 들며 말했다.
"아빠. 이건 뭐지?"
능구렁이 같이, 다 알고 있으면서.
"먹고 싶어?"
"먹어도 돼여?"
"먹어"
사탕 한 알을 입에 넣고 기분 좋게 차로 뛰어가는데,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사탕이 입 밖으로 탈출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소윤이가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닥을 급히 훑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 떨어졌어여"
"소윤아. 울지 말고, 가서 하나 더 달라고 말씀드려 봐. 먹다가 떨어뜨렸다고"
다시 가게로 가서 소윤이만 들어갔다. 문 밖에서 보니 쫑알쫑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소윤이에게 직원분이 사탕 두어 개를 손에 쥐어 주셨다. 소윤이가 한 개만 취하고, 나머지는 다시 직원 분에게 돌려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입모양도 보였다.
"괜찮아여"
다시 돌아온 소윤이에게 물어봤다.
"소윤이가 괜찮다고 하고 돌려 드렸어?"
"응"
"왜?"
"아빠가 한 개만 먹으라고 했으니까"
집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라 애들은 거의 눕자마자 잠들었다. 아내와 둘이 거실 바닥에 앉아서 아내가 파주에서 챙겨 온 [카라멜콘과 땅콩]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땅콩만 찾아 골라 먹는 나에게 아내가 소윤이 같다고 했다.
오늘은 중간에 누구도 깨지 않아서 아내랑 나랑 끝까지 같이 있다가 자러 들어갔다.
(아. 맞다. 아내가 마켓컬리에서 긴급하게 시킨 하겐다즈는 아내와 내가 오늘 밤 긴급하게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