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2(화)
요즘 시윤이는 자기 누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보면 각각의 주인을 불러댄다. 신기한 건 "누나"는 분명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엄마도 하고 아빠도 하고, 심지어 하버(할아버지), 하머(할머니)도 하는데 누나만큼은 하지 않는다. 경쟁자라 그런가. 또 아침에 출근할 때면 내 텀블러를 꼭 자기가 갖다 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어쩔 수 없이 소윤이가 가져다준 텀블러를 다시 시윤이에게 주고 갖다 달라고 하는데, 이것도 지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처음부터 자기가 안 줬다고 짜증 낼 때도 있다.
아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바깥 일정 없이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낮에는 시윤이 낮잠 재우다가 또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카톡을 보냈다. 애들은 참 한 순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눕히기만 하면 금방 눈을 감고 자던 녀석이, 이제 자기 싫다고 장난치고 버티며 신종 스트레스를 선사하고 있으니. 밖에서 기다리는 소윤이는 소윤이대로 지겹고, 외롭고. 차라리 안 재우는 게 낫겠지만, 그러기에는 밤잠까지 버틸만한 체력이 없고, 늦은 낮잠은 우리의 밤을 빼앗아 가니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다 오후 늦게 장모님이 오셔서 잠깐 카페에 다녀왔다고 했다. 장인어른도 퇴근하고 오셔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퇴근하면서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갔다.
"아빠. 엄청 보고 싶었어여"
"아빠도 소윤이 엄청 보고 싶었어"
"아빠아"
"시윤이도 아빠 보고 싶었어?"
"으"
"얼만큼?"
"아. 마아(많이)"
시윤이의 말문이 터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집 앞에서 낙지볶음을 먹기로 했다. 요즘은 시윤이 옷 입혀서 나가는 게 중노동 중 하나다. 소윤이도 그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내 말처럼 기억의 흐릿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너 추울까 봐 옷 입혀준다는데 도대체 왜 내가 사정사정해야 되며, 편하게 유모차로 모신다는데 왜 굽신거려야 하는 거냐. 아들아.
소윤이도 시윤이도 저녁 식사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시윤이는 "하버. 하버" 그러면서 할아버지한테 먹여 달라고 난리 더니, 정작 잘 먹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소윤이대로 안 먹고 뭉그적거렸고, 결국 장모님이 먹여주셨다. 식사 훈련을 시작한 뒤로 (나는) 먹여준 일이 거의 없다.
밥 먹고 나서는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소윤이가 할머니한테 귓속말로 뭔가 속삭였다. 내 눈치를 살살 보면서.
"소윤아. 너 아까 빵도 샀으면서 뭘 또 사달라고 해"
아랑곳하지 않고 귓속말을 이어갔다. 할머니를 등에 업고 마카롱을 두 개나 손에 쥐고 왔다. 시윤이는 올리브 치아바타로 자리에 좀 묶어두려고 했는데 잘 통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시윤이만 할 때는 왜 그렇게 계단을 좋아하는 거지. 장모님이 한 10여분 시윤이와 소윤이를 데리고 계시다가 기권을 선언하셨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유모차 안 타겠다는 걸 설득과 협박을 섞어 반강제로 욱여넣었다.
살짝 기대를 하긴 했지만 내심 설마 그러겠냐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시윤이가 유모차에서 잠들었다. 그대로 방에 옮겨 눕혔다. 소윤이는 아내랑 씻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소윤이랑 아내도 방에 들어왔다.
시윤이 숨소리, 아내 숨소리, 소윤이 숨소리가 겹치며 차례대로 들렸다. 아마 다들 잠든 것 같았다. 아내를 깨워서 같이 나갈지, 아니면 그대로 자게 둘지 고민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스스로 깼다.
"여보. 잠들었어?"
"아니. 나 안 잤어"
대체 왜 안 잤다고 하는 걸까? 어렸을 때 자다가 크게 손해 본 일이 있었나? 자꾸 부인해서 부인인 건가.
난 축구를 보며 일기를 썼고, 아내는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고 트렌드를 쫓아가는데 힘을 썼다.(카톡하고 웹서핑했다는 얘기다)
"여보. 일단 씻어"
"어. 그래야지"
당연히 아내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다 설거지하려고 고무장갑을 낀 순간, 시윤이가 방에서 나왔다. 아내와 내가 연인일 때 내가 아내에게 사준, 아내의 잠자리 동무가 되었다가 한때 소윤이의 사랑을 받았던 곰인형을 껴안고.
아빠랑 자러 들어가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지, 아빠는 절대 안 되고 무조건 엄마만 찾는 건 누나랑 똑같다.(사실 다행이다 싶을 때도 많다. 밤의 자유를 빼앗기면 그건 또 슬플 테니까) 그래도 말은 다 알아 들어서 나랑 들어가자면 싫다고 하고, 엄마 화장실 갔다 올 동안만 안겨 있으라고 하면 그건 또 수긍한다.
시윤이가 점점 요주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아내는 고무장갑을 벗고 시윤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입고 나갔던 옷도 갈아 입지 못한 채.
그러게 좀 미리 씻고 그러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