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23(수)
오늘은 시윤이가 많이 안 우는 것 같았다. 종종 통화할 때 들리는 아내의 음성과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는 분위기가 차갑지 않았다. 다만 오후쯤 아내랑 통화를 하는데 아내가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기도가 필요해. 자꾸 짜증이 나고, 잔소리를 하게 돼"
"왜? 특별한 원인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육아로 인한 만성피로?"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소윤이한테 잔소리한다고?"
"그렇지"
특별히 어떤 계기나 원인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육아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혹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만성 우울감이라고 해야 할까. 우울감이라기보다는 신경질에 가까울 수도 있고. 최근에 부각되는 원인이라면, 강시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꼽을 수 있다. 점점 어려워지는 낮잠 재우기로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된다고 호소했다.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내의 이런 증상(?)이 보이면 나는 주로 내보내는 편이다. 사실 그거 말고는 딱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없다. 퇴근하면 바로 아내를 내보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내)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외할머니가 고관절을 다치셔서 수술을 하신다는 걸 알게 됐다. 애들이랑 갈까 했는데, 오늘은 수술 당일이라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다음에 가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응급상황을 대비해서 피를 확보해 놓아야 하는데 (내) 아빠가 헌혈한 건 수술할 때 모두 썼고, 엄마는 감기에 걸려서 헌혈이 불가능하니 나의 피도 좀 보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의 이름과 병원을 말하고 헌혈하면 그 피를 바로 이용(?) 가능하다고 했다.
정발산에 헌혈의 집이 있길래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
"아. 여기 해당하는 지역에서 최근에 지내신 적 없으시구요?"
"아. 저 파주에서 잤는데"
"언제요?"
"글쎄요. 사는 건 아닌데요"
"연고가 있으신가요?"
"네. 처갓댁이요"
"아. 그러세요. 그럼 일단 11월에 마지막 숙박한 걸로 할게요"
"네"
"파주 지역은 원래 어쩌구저쩌구 쏼라쏼라"
내용인 즉, 헌혈이 가능하긴 하지만 피가 바로 보내지 지는 않고 15일 보관 후 보내진 다는 얘기였다. 파주가 말라리아 위험지역이라서. 그렇게 되면 헌혈하는 게 소용이 있나 싶기는 했지만, 어쨌든 피를 뽑기 시작했다. 선물을 고르라고 했다. 여러 개가 있었는데 마침 영화티켓이 있길래 골랐다. 아내한테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를 더 고르라길래 축축 쳐지는 사진 속 내 얼굴을 떠올리며 남성용 화장품을 골랐다.
아내는 오후 늦게 어린이집 등원 동지들과 키즈카페에 간다고 했다. 역시나 시윤이는 아내와 소윤이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참 동안 유모차에서 버티다가 잠들었다.
헌혈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어. 이제 가려고"
"아. 그래? 우리도 이제 갈 거야. 얼추 비슷하겠다"
"잘됐네. 헌혈하고 선물도 받았어. 영화티켓이랑 화장품. 여보 오늘 영화 보러 가"
"갑자기? 왜?"
"그냥. 우울하다며"
"진짜? 알았어. 일단 집에서 만나"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더니 아내랑 아이들도 막 들어와서 옷을 벗고 있었다.
"아빠. 우리도 좀 전에 왔어여"
키즈카페에서 저녁도 먹고 온 터라 씻겨서 재우기만 하면 됐다. 일단 아내가 데리고 들어가서 재우기 시작했는데, 강시윤이 협조하지 않았다. 거실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혼자 중얼거리고 깔깔대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여보. 난 나갈 수 있을까]
아내의 카톡을 받자마자,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보. 나가"
"지금?"
"어. 시윤이 한참 걸릴지도 모르잖아"
"그래. 알았어"
시윤이는 용케 알아듣고 나가지 말라며 울기 시작했다. 밀어붙였다. 나에게 돌아올 시련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를 보려고 했다가 못 보는 건 더 짜증 나니까.
자신의 만류와 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떠나는 아내를 보며, 시윤이는 더 크게 목놓아 울었다. 아주 잠깐 동안. 그러더니 금방 울음을 그치고는 다시 아까처럼 커튼 뒤에 숨어서 장난을 쳤다.
"시윤아. 이리 와서 누워. 시윤이 자리에"
"아아아아"
"얼른"
"아아아아"
"그럼 아빠 나간다"
"아아아아"
복수하는 건가.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고 커튼 뒤에 숨어서 중얼거리며 놀았다.
"시윤아. 아빠 나간다"
정말 문을 닫고 나와 봤다. 예상과는 다르게 따라 나오지 않았다. 중얼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한 20여분 기다렸더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시윤이가 나오지는 않고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히 날 바라봤다.
"강시윤. 얼른 누워서 자"
그랬더니 문을 닫고 타다다다 다시 매트리스 위로 도망쳤다. 문을 열고 얘기했다.
"시윤아. 아빠랑 잘까?"
"아아아아"
"안 잘 거야?"
"응"
"왜 안 자. 자야지. 시윤이 자리에 가서 누워"
"아아아아"
"아빠랑 같이 누울까?"
"아아아아"
"그럼 아빠 또 나간다?"
"응"
또 닫고 나왔다. 마찬가지로 시윤이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한 10여분쯤 지나니 다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일어나서 걸어오는 것만 보고도 문을 닫고 도망쳤다. 또 문을 열고 말했다.
"시윤아. 안 자?"
"응"
"아빠랑 같이 누워서 자자. 시윤이 자리에 가"
"아아아아"
"아빠 나간다"
이번에도 따라 나오지는 않았지만,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다.
"강시윤. 아빠랑 잘 거야?"
"응"
"잘 거야? 시윤이 자리에 누울 거야?"
"응"
삼고초려는 삼고초련데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가서 사정한 거니. 문을 열고 찾아온 건 너인데 왜 아빠가 더 애가 탔을까.
누워서도 바로 자지는 않았다. 계속 중얼거리고 장난치다가 베개를 팡팡 치길래
"강시윤. 어허. 누가 장난을 쳐"
하고 조금 무섭게 말했더니 바로 멈췄다. 그러고는 잠들었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 나왔다. 조금 허망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며 해소된 아내의 우울감이 나에게 옮겨 왔나 싶은 짜증이 차오르기도 했지만 잘 참았다.
'그래. 평소에는 일찍 자니까, 이런 날도 있을 수 있지'
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평소에는 일찍 자면서, 오늘은 왜 안 그래?'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온 아내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지. 영화 보러 가기 전에도 아내의 기분이 딱히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일종의 예방주사라고 생각했다. 방전이 되기 전에 조금 더 충전했달까.
난 정말 헌신적인 남편인가 보다. 피를 바쳐 아내의 영화 시청을 마련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