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30(주일)
보통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찝찝했던 기분이 누그러들거나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의지를 내는 편이다. 오늘은 달랐다. 짜증이 나려고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짜증은 이미 났고 그게 밖으로 막 터져 나오려고 했다. 어제 아내의 마지막 요구는 ‘불가능해도 매 순간 다정하고 친절했으면 좋겠다’였다. 난 밖에서보다 집에서 훨씬 친절하고 밝고 다정한 사람인 만큼 말 그대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매 순간’을 ‘더’로 바꾸면 성립 가능한 요구였다. 오늘 아침에는 그게 안 됐다. 이럴 때 괜히 아이들에게 불똥을 튀기는 걸 조심해야 한다. 적당한 건 수 하나 잡아서 거기에 내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빠로서 최악의 행동이다.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교회에 가서도 계속 마음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예배를 드려서 그런 건지 다른 이들에게 ‘부부’로 섞여서 관계를 해야 하니 그런 건지, 아무튼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예배 드리고 나면 점심을 먹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잠시 쉬었다가 오후 예배를 드리고, 오후 예배를 드리고 나면 목장 모임을 하고, 목장 모임을 하고 나면 성경 공부를 한다. 모든 걸 마치고 집에 가면 저녁 먹을 시간이다. 오늘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의 일정이 모두 사라졌다. 마지막 주라서 그런 거였다. 저 시간들이 싫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보내고 나면 너무 좋지만, 어떤 모양이든 예고에 없는 휴식은 대학생 시절의 갑작스러운 휴강 공고 같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기분도 조금씩 나아졌다. 유쾌하기는 어려웠지만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늘까지 종이 상품권으로 바꿔야 하는 모바일 상품권이 있어서 마트에 가야 했다. 시내에 있는 마트에 가야 해서 교회에서 바로 거기로 갔다. 상품권을 바꾸고 잠깐 장도 봤다.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다녔고 난 카트에 탄 서윤이와 함께 다녔다. 별 거 아닌데 서윤이와 둘이 있을 때의 행복은 여전하다. 요즘 나에게 많이 튕기는 시기라 더 그렇다. 안아 달라고 하면 도망가고, 뽀뽀 해 달라고 하면 도망가고, 오라고 하면 가고. 장난을 치는 거지만 부를 때마다 달려 오고 요구할 때마다 받았던 시기를 지나니 아쉽긴 하다. 그러다 보니 둘이 보내는 시간이 꽤 행복하다.
시내에 나왔으니 커피와 빵도 샀다(시내에 나오지 않으면 커피고 빵이고 안 먹는다는 건 아니지만). 저녁은 집에 와서 리조또를 만들어 줬다. 토마토 소스가 있어서 아주 간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부속 재료를 한 팔로 준비하는 게 적잖이 고생스럽긴 해도. 난 리조또를 안 먹었다. 뭔가 얼큰한 게 먹고 싶었다. 라면을 먹었다. 그것도 컵라면으로. 먹을 만한 얼큰한 건 그것 뿐이었다. 무척 만족스러웠다. 리조또는 서윤이도 잘 먹었다. 서윤이는 서양의 맛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면을 싫어하는 게 확실하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면은 안 먹고 밥은 잘 먹는다. 앞으로 파스타 만드는 날에 조금 더 귀찮게 됐다.
아내는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도 무척 바빴다. 오늘 밤에 형님(아내 오빠)네 식구가 오기로 했다. 아내는 조카가 먹을 이유식과 내일 아침으로 먹을 음식을 준비하느라 몇 시간 동안 계속 분주했다. 형님네 가족은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 아내는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바빴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에게는 비밀이었다.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어제였다. 장모님이 보내 주신 새우 얘기를 하면서
“형님네 오면 같이 먹으라고 보내주셨구나”
라고 얘기하는 걸 소윤이가 들었다. 소윤이가 들었다기 보다는 내가 대놓고 떠들었다. 소윤이가 바로 그게 무슨 소리냐며 물어봤는데 대충 둘러댔다.
“아, 삼촌이 언젠가 오면 같이 먹으라고 보내주셨나 보다고.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아마 한 11월에는 오지 않을까?”
옆에서 아내도 거들었다. 소윤이는 뭔가 미심쩍은 듯했지만 깊게 의심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두 번째 위기는 오늘이었다. 교회에서 K가 소윤이에게
“소윤아. 오늘 삼촌 온다며. 엄청 좋겠다”
라고 얘기한 거다. 소윤이는 나에게 오늘 삼촌이 오냐며 이상한 듯 물었다. 이번에는 그냥 막무가내로 덮었다.
“삼촌?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00 삼촌이 착각했나 보네. 다른 친구랑”
마찬가지로 엄청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재웠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삼촌과 숙모, 사촌 동생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아, 그랬구나’라고 생각할 거다.
덕분에 나도 내일은 하루 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