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참 길구나

19.01.26(토)

by 어깨아빠

"여보. 애들 한 10시까지 자면 좋겠다"


어젯밤 아내와 나눈 대화는 당시에도, 오늘 아침에도 참 무의미했다.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 잠들었지만 일어나는 건 비슷했다. 요즘은 항상 8시를 넘겨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7시 땡하면 눈을 뜨던 시절에 비하면 엄청난 호사를 누리고 있다.


아침 먹고 나서 소파 밑을 청소했다. 소파를 들여 놓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핑계로 삼던


'애들 없을 때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해야지'


라는 말은 영원히 안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갑작스럽게 아내에게 제안했고, 청소 제안은 거절하는 법이 없는 아내도 당연히 환영했다. 그나마 소파가 쉽게 밀려서 이동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와. 별의 별 게 다 있었다. 각종 색연필, 장난감, 찰흙, 콩, 귤껍질 등등. 아내가 탄식을 내뱉었던 것처럼 딱 하나 없는 게 있었다. 돈.


"아. 돈은 없네"


소파 밑에 잠들어 있던 여러 발굴물 중 사용할 것과 버릴 것을 분류하는데, 옆에서 소윤이가 참견을 했다.


"아빠. 그건 버리면 안 되는데"

"왜. 이건 그동안 안 썼잖아"

"안 보이니까 안 썼지"

"버려도 될 것 같은데"

"버리지 마세여. 아빠"


소윤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몰래 몰래 열심히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소윤이가 아침부터 노래를 불렀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찰흙 놀이를 시작했다. 오늘은 유독 왜 그렇게 하기가 싫은지, 정말 의욕이 안 생겼다. 상을 펴주고, 찰흙을 꺼내준 뒤 소파에 앉았다.


"아빠. 왜 같이 안 해여?"

"오늘은 그냥 소윤이 혼자 해"

"아빠도 같이 해여"

"그냥 혼자 해. 아빠는 여기서 구경할 게"

"싫어여. 아빠랑 같이 하는 게 좋아여"


결국 소윤이 옆에 앉기는 했는데, 코끼리 하나 만들고 나서는 꾀를 피우며 놀아줬다. 다행히(?) 찰흙놀이를 길게 하지는 않았다.


시윤이는 어제 많이 늦게 자고 오늘 평소와 같이 일어난 여파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졸려 보였다. 졸음이 가득 찬 것 같길래 낮잠을 권했다.


"시윤아. 아빠랑 들어가서 코 잘까?"

"아아아아아"

"왜. 시윤이 졸리잖아. 아빠랑 들어가서 코 자자"

"아아아아. 엄마아"

"엄마랑 자고 싶어?"

"응"

"아빠랑 자자. 아빠가 토닥토닥 해줄까?"

"아아아아. 엄마아"

"그래? 그럼 엄마랑 들어가면 잘 거야?"

"응"


평일에도 낮잠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주말까지 시달리는 걸 막아주고 싶었다. 평범한 설득과 권면이 매몰차게 거절 당하니 다른 수를 썼다. 이른바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작전].


"시윤아. 오오오오오. 이리 와 봐"

"으? 으?"

"얼른 와 봐. 얼른 얼른. 곰돌아지가 지금 졸리대. 얼른 같이 들어가서 잘까?"

"으? 엄마?"

"아니. 아빠랑. 얼른 얼른 얼른. 아빠랑 들어가서 코 자자"


그래도 아직까지는, 일단 들어가게만 하면 그 뒤로는 포기(혹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곰돌아지(인형 이름)를 꼭 껴안고 순식간에 잠들었다.


거실에 나와 시계를 봤더니, 또 어느새 점심시간.(정확히 말하면,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진짜 삼시 세끼가 보통 일이 아니다. 밥을 먹이자니 저녁이랑 간격이 너무 짧아질 것 같아서 식사는 아니되 간단히 요기할 만한 게 뭐가 있나 살펴봤는데 딱히 없었다. 기껏해야 만두 정도가 전부였다.


"여보. 차라리 맛있는 빵 사와서 그걸로 때울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네 내가 사올까?"

"그럴래?"


"엄마. 나도 엄마랑 같이 갈래"

"소윤이는 그냥 집에 있어"

"아. 엄마랑 같이 갈래여"

"그럼 엄마랑 그냥 집에 있을까? 아빠 보고 사오시라고 하고?"

"아니. 그럼 아빠랑 갈래여"


소윤이도 답답하긴 했을 거다. 주말인데 아무데도 못 나가고. 식빵, 치즈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소윤이랑 잠깐 집 앞에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저런 얘기도 나눌 수 있고. 다만, 잘 걷지 않으려고 해서 몸이 좀 힘들긴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는 라떼, 나는 아메리카노를 타고 소윤이는 우유를 따라줬다. 카야잼을 바른 식빵과 치아바타는 함께 먹고, 샌드위치는 아내랑 내가 나눠 먹었다.


"여보. 평화롭다. 2호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소윤이한테 시윤이의 부재로 극대화되는 평화로움을 굳이 각인시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보안 용어를 사용했다. 정말 그랬다. 해는 한 가운데 떠서 베란다에 잔뜩 쏟아지고,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소윤이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BGM으로 클래식이 흘러도 어울릴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빵을 다 먹었을 때까지도 시윤이가 깨지 않길래 내가 들어가서 깨웠다. 볼은 벌겋게 상기 되고, 콧물 자국은 허옇게 나고, 머리는 까치집에, 옷은 후줄근한 게 정말 어디 시골 촌에서 올라온 애 같았다. 그런 모습을 하고는, 거실에 나오자 마자 한자리 차지 하고 앉아서 치아바타를 흡입했다.


시윤이가 등장했다고 아까의 그 평화로움이 깨지지는 않았다. 오늘은 시윤이가 매우 협조적이었다.


오늘도 부모교육이 있어서 가야 했다. 지난주처럼 난 오늘도 가지 않기로 했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설 연휴 끝나고 나서는 성실히 참여하겠다고. 아내가 교회에서 부모교육 받는 동안, 난 카페에서 강의도 듣고 일기도 썼다. 강의가 짧아서 금방 올 줄 알았는데, 강의 후 나눔이 길어져서 아내는 꽤 늦게 끝났다.


"여보. 이제 끝나서 가려고"


아내의 한마디만 듣고도, 소윤이나 시윤이 중 한 명이, 혹은 둘이 함께 아내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보. 힘들었어?"

"어. 그냥 좀. 일단 갈게"


알아서 기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시 후 아내와 아이들이 왔고, 난 차에 올라 탔다.


"여보. 우리 여기서 저녁 먹고 가자"

"그럴까? 여기 뭐 먹을 게 있지?"

"일단 돌아보자"


소윤이는 울상이었고, 시윤이는 엄지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아내에게 대충 들어보니, 소윤이는 가득찬 졸음에서 유발되는 생떼가 자주 있었다고 했다. 그 동네에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그냥 차로 이동하며 갈만한 곳을 살피다가 만둣국과 평양냉면을 파는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여보. 저기 갈까?"

"오. 좋네. 애들이랑 먹기도 좋고. 맛있겠지?"

"그냥 뭐 가볍게 한 끼 때우는 건데. 대충 먹으면 되지"


아내는 맛집을 찾기 위해서도 검색을 하지만, 이미 식당을 결정하고 나서도 그 식당에 관한 포스팅을 찾곤 한다. 아내의 검색 결과에 의하면, 꽤 포스팅도 많고 좋은 후기가 많은 곳이었다. 들어가서 앉았을 때도 뭔가 맛집의 분위기가 풍겨 왔다. 평양냉면 곱배기, 만둣국(+공기밥), 녹두지짐이(大). 이렇게 시켰다. 어느 부분이 가볍게 먹자는 사전의 다짐을 반영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시켰다.


대박. 맛집을 찾아냈다. 밑반찬까지 어느 하나 맛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일하시는 나이 많으신 직원 분들도 너무 친절하시고. 소윤이랑 시윤이도 맛있었는지, 시윤이는 녹두지짐이를 쉴 새 없이 먹어 치우다가 만두가 식고 나서는 맨 손으로 잡고 만두를 뜯어 먹었다. 소윤이도 단 한 번의 채근도 없이 알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잘 먹었다. 나중에 계산하면서 보니 유명인사들도 많이 오고, 방송에도 나온 아주 유명한 맛집이었다.


이제 모든 활동은 끝이 났다. 씻길 일이 남았지만, 상황과 환경에 따라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이미 허다했다. 얘네가 집에 가면서 잠들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시윤이는 타자마자 바로 잠들었고, 소윤이는 꽤 오래 버텼다. 아무래도 오늘은 차에서 잠들지 않겠다 싶어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거의 집에 다 왔을 무렵에 소윤이를 봤더

니 졸음과 사투중이었다. 조금 더 돌기로 했고, 성공했다.


둘을 나란히 방에 눕히고 나와서, 아내와 나는 손뼉을 마주치며 기쁨의 세레모니를 나눴다.


"여보. 퇴근이다"

"그러게. 좋다"


재우는 데 힘 안 쓰고 퇴근해서 좋기는 했는데, 아내는 11시도 안 돼서 시윤이한테 끌려 들어갔다. 시간이 그렇게 늦지 않아서 재우고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걸로 끝. 이별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문 여는 걸 터득했을까. 그때 초장에 잡았어야 했는데. 다시는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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